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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송지 어란서 13척의 배로 첫 승리를 거두다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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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29  09: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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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③송지 어란진 편]

조선수군, 칠천량 참배 후 첫 승리, 두려움을 이기다
이순신, 평탄하지 못했던 해남여정, 매일이 괴로웠다

   
▲ 이순신은 송지 어란에서 방어 중심의 전략을 편다. 13척의 배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방어뿐이었고 따라서 주로 섬이 있는 곳에서 진을 쳤다. 송지 어란은 앞에 어불도가 있어 수군의 진영을 감출 수 있었다.

어란해전, 통제사 복귀 후 첫 승리

이순신이 배설의 배 12척을 인수한 후 왜 수군과 첫 전투를 벌인 곳이 송지 어란이다. 이때 조선수군의 배는 장흥 회령포에서 수선한 배 한 척을 더해 13척이었다. 어란에서의 해전은 칠천량 참패 후 조선 수군이 승리한 첫 전투였으며 조선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백의종군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이 해남땅에 오게 된 때는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26일 전인 1597년 8월20일이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순신의 해남여정은 인사불성이 돼 아프기도 하고 두려움에 떠는 조선수군을 지켜봐야 하는 등 내부적으로도  하루하루가 힘든 날들이었다. 한마디로 이 시기 이순신은 아픔과 고뇌, 분노의 나날이었고 왜수군이 뒤에서 바짝 쫓아오는 숨 가쁜 여정이었다.
이순신은 1597년 2월 수군본영이 있던 한산도에서 체포돼 그해 4월1일 석방된다. 백의종군 중 칠천량 해전의 참패를 접하고 그해 8월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로 임명돼 17일 만에 도착한 곳이 북평면 이진이다. 1597년 8월20일 이순신은 배설로부터 인수 받은 배 등 13척의 진용으로 북평면 이진에 이르지만 몹시 아파 4일간 이곳에서 머무른다. 토하기를 10여 차례, 토사곽란으로 2번이나 인상불성이 된 이순신은 24일에야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이진을 떠난다.

 

왜수군, 북평 이진에 당도하다

아침 일찍 이진을 떠난 이순신은 북평면 영전(남성리라는 설도 있다)에서 아침을 먹고 낮에 송지 어란에 도착해 진을 쳤다.
이순신이 1년 전인 1596년 8월에 해남을 순시 왔을 때와 달리 이때의 해남 땅은 텅텅 비어 있었다. 전쟁이 전 국토로 확장되고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왜수군이 서남해안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기에 모두 피난을 떠난 것이다. 송지 어란에 도착해서 쓴 8월24일자 난중일기에는 ‘가는 곳마다 마을이 텅텅 비어 있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이 이진을 떠나 송지 어란에 진을 쳤을 때인 8월26일 일본수군은 북평면 이진에 진을 친다. 26일 난중일기에 ‘임준영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왜적의 배가 벌써 이진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이 이진을 떠난 이틀 후 왜수군이 이진에 이른 것이다. 배로 반나절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 대치하게 된 상항이다.

 

이순신, 장수들 때문에 고통받다

이때의 난중일기를 보면 위축된 조선수군과 장수들 때문에 이순신이 고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5일 어란에서 쓴 난중일기에 배설이 벌써 도망쳤다고 적고 있다. 또 27일 난중일기에는 ‘배설이 다시 보러왔는데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내가 불쑥 말하기를 수사는 어디로 피해갔던 거 아니냐 하고 캐물었다’고 적고 있다.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을 친 배설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낸 것이 난중일기 곳곳에 나타난다. 배설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강진 병영에 이르렀을 때 타고 갈 배를 보내지 않았다. 또 12척의 배를 이순신에게 인도한 장흥 회령포에선 배 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이 장흥 회령포에서 여러 장수들에게 임금이 내린 교서와 유서 앞에 예를 올리도록 했을 때도 배설은 따르지 않았다. 이때의 난중일기에는 ‘약속을 어긴 배설의 짓이 괘씸하였다. 교서와 유서 앞에 예를 올리지 않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고 적고 있다. 이때 이순신은 배설 대신 그의 아래 딸린 이방과 영리를 붙들어 곤장을 때렸다.

 

이순신, 임금인 선조를 원망했을까

조정의 답답한 상황도 나타난다. 8월26일 선조가 임명한 김억추가 전라 우수사로 부임해 이순신이 머물고 있는 송지 어란으로 왔다. 이날 어란에서 쓴 난중일기에는 ‘전라우수사가 왔는데 배에서 필요한 격군과 장비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꼴이 놀랄만한 일이다.’ 전시 때인데도 장수된 자가 달랑 몸만 왔다는 비난이다. 이순신은 이어 9월8일 진도 벽파진에서 쓴 일기에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대책을 토의하였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에나 맞을까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못 만난 것만을 한탄할 따름이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인사를 한 선조임금을 우회적으로 비난한 것일까.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매월 1일과 15일 선조임금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면서도 왕에 대한 충성이나 연민을 표현한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배를 당해도 왕에 대한 그리움을 시나 글로서 썼던 여타 양반들과는 사뭇 다르다. 현장을 무시한 명령만 반복하는 임금,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임금에 대한 서운함이었을까.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수한 후 7일 만에 도착한 송지 어란에서의 이순신은 이렇듯 칠천량 해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군과 장수, 또 위급한 전시에 보여준 선조임금의 인사 난맥상 등 내부적으로도 고단했다. 

   
▲ 조선시대 수군진이었던 송지 어란에는 마을을 에워싼 성이 존재했다. 현재 민가 담으로 이용하고 있는 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 새벽에 기습을 당하다

이러할 때 왜군이 새벽에 어란포를 기습해 왔다. 왜수군이 이진에 진을 친지 이틀 후, 이순신이 어란포에 진을 친지 4일만이다. 8월28일 난중일기에는 ‘새벽 6시쯤 적선 여덟 척이 갑자기 덤벼들어 여러 배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려 했다. 경사수사도 달아나려고 하였다.’
칠천량 패배 후 조선 수군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이순신과 함께 한산도 대첩 등 혁혁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과 수군 대부분이 죽임을 당한 것이 칠천량 해전이다. 또 칠천량 해전 때만 해도 조선수군은 160여척의 전선을 갖췄고 계속된 전쟁의 승리로 자신감도 컸다. 그러나 이젠 배 13척, 어찌 배설만 두려워했겠는가. 칠천량 해전의 악몽에서 시달린 조선 수군과 장수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특히 송지 어란에서의 왜 수군의 기습은 칠천량 해전 후 조선수군이 처음 맞닥뜨린 전투였다. 당연히 공포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이때도 이순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추격을 명한다. 이틀 전 탐방꾼 임준영으로부터 왜적이 이진에 이르렀음을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활발한 첩보활동을 한다. 적의 동태를 파악한 후에 그에 따른 대비를 했는데 어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난중일기에는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을 명령했다. 하는 수 없이 여러 배들이 피하지 못하고 적선을 쫓아 단숨에 영암 땅 갈두까지 나갔다.’ 이때 송지면 갈두인 지금의 땅끝은 영암의 땅이었다. 기습을 했던 왜수군은 뜻하지 않은 조선수군의 위용 앞에 멀리 도망을 쳤다. 어란을 기습한 왜선은 8척이었지만 뒤따르던 배는 50여척에 이르렀다. 단순한 선발대가 아닌 대규모 도발이었던 것이다. 이날 저녁 이순신은 송지면 내장리에 진을 치고 날을 샌다. 그리고 이미 적에게 노출된 어란을 뒤로 하고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한다. 이순신이 어란에서 벽파진으로 이동한 일주일 후에 왜수군이 이진에서 어란으로 옮겨와 진을 쳤다.

   
▲ 조선시대 수군진이 위치했던 송지어란 마을회관 앞에는 수군만호들의 공적비가 남아있다.

이순신, 주로 섬 뒤에 진을 치다

이때의 이순신은 방어 중심의 전략을 편다. 13척의 배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방어뿐이었고 따라서 주로 섬이 있는 곳에서 진을 쳤다. 송지 어란은 앞에 어불도가 있어 수군의 진영을 감출 수 있었다. 송지 내장리 앞에도 섬이 있었고 벽파진도 마찬가지다. 명량해전이 일어난 우수영도 양도섬이 가로 막고 있었다.
이순신은 군율을 어기거나 사기를 저하시키는 행위에 대해선 엄중히 처벌했다. 난중일기에는 군율을 어긴 군관이나 아전들을 매로 다스린 기록이 숱하게 나온다.
특히 탈영병이나 군량절도범, 직무태만과 민폐를 끼치는 행위는 용서를 하지 않았다. 문란해진 국가의 기강, 뇌물이 통하는 부패한 세상에서 자신만이라도 기강을 잡으려 했을까.
송지 어란에 도착한 다음다음날인 25일 당포에서 온 포작인이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와서 잡아먹으려고 거짓으로 왜적이 왔다는 유언비어를 터뜨렸을 때도 이순신은 이를 엄히 다스린다. 이순신은 유언비어를 유포한 포작인 2명을 체포해 목을 베어 매달아 널리 보이게 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민폐를 입히거나 전의를 상실시킬 수 있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선 엄히 다스린 것이다. 포작인 2명의 참수로 동요했던 군중은 안정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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