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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벽파진서 2번 승리…그러나 외로움에 울다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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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05  09: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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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진도벽파진에서 2번 일본군을 무찌르지만 자신의 신세를 탄식하며 외로움에 눈물 짓는다.(진도 벽파진 전첩비)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④진도 벽파진 편

왜수군 송지 어란포에 진 구축, 배설 우수영서 도주  
전투 앞두고 꿈을 꾸며 전쟁의 불확실성으로 고뇌

 

송지 어란에서 한차례 전투를 벌인 이순신은 어란을 뒤로하고 진도 벽파진에 이른다. 이때가 8월29일,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17일 전이다.
당시 진도 벽파진은 우수영과 함께 서해와 남해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진도대교 준공 이전까지 황산면 성산 나루터에서 진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고 바다가 중심인 시절엔 천하 호걸들의 활동무대였다. 통일신라시대 말엔 장보고의 중국무역항로였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서남해안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견훤을 압박했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또 고려 여몽항쟁 때 황산면 성산의 삼지원에 진을 친 김방경의 여몽연합군에 맞선 배중손의 삼별초군이 진을 쳤던 곳이 벽파진이다. 그로부터 300년 후 이순신과 13척의 배가 벽파진에 도착한 것이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에 있어 어란과 벽파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의미한다. 칠천량 참패 후 어란에서의 1회 승리와 벽파진에서의 2회 승리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즉 칠천량의 패배를 지우고 전투력을 높일 수 있었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이순신은 홀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신세를 탄식한다.  

   
▲ 벽파진에 세워진 벽파진 전첩비 앞에서 바라본 진도 벽파진 전경

이순신, 정탐꾼 각지로 파견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다음날 이순신은 정탐병을 각지로 나눠 보낸다. 이순신은 전쟁 내내 탐방꾼과 의병장, 피난민, 항복해온 왜군을 통해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이러한 첩보전으로 적의 동태를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벽파진에서도 군관 임중형과 탐방꾼 임준영으로부터 적이 송지 어란에 도착했음을 미리 보고받고 기습을 대비한다.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서 17일간 머문다. 이순신이 사지인 명량을 뒤에 두고 벽파진에서 오랜시간 머문 것은 날씨 때문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7일간 북풍과 추위, 비 때문에 애를 먹었다. 벽파진에서 쓴 난중일기에는 북풍으로 각 배를 보호하는데 힘이 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이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지 9일째인 9월7일 북평 이진에 있던 왜수군이 송지 어란포로 옮겨와 진을 쳤다. 아마 이진에 머물던 왜수군도 북풍이 가라앉자 곧바로 어란으로 진을 옮겨온 듯 하다.
이때 난중일기 7일자에는 ‘바람이 그치기 시작하자 망군인 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중 13척이 벌써 어란포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아마 그 목표가 우리 수군에 있을 것입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두 번 세 번 엄하게 군령을 내린다.

배설, 우수영에서 도주

조선수군은 송지 어란에서 왜군을 격파한 경험이 있었지만 이때도 두려움은 여전했다. 배설도 여전히 두려움에 갇혀 있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도착한 다음날 배설이 도망가려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에 이순신은 관하의 여러 장수들에게 그를 데려오라 하지만 그는 자신의 종을 시켜 병세가 매우 위태로워 조리를 하겠다고 보고한다. 이순신이 이를 허락하자 배설은 벽파진에서 배를 타고 우수영에 도착한 이틀 후 도망을 간다. 그렇잖아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수군은 배설의 도주로 사기는 더 저하된다. 이러한 조선수군의 사기 앞에 이순신은 전투를 앞두고 엄한 군령을 되풀이 한다.
망군인 임중형으로부터 적선이 어란에 도착했다고 보고받은 그날 오후 4시경 적선 13척이 벽파진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조선수군은 먼 바다까지 적선을 추격한 후 돌아왔다.
왜적을 멀리 내쫓고 벽파진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모든 장수들을 다시 불러 모아 군령을 내린다. “오늘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  두 번 세 번 타일렀다.  예상대로 그날 밤 10시 경 왜수군은 어둠을 이용해 탄환을 쏘며 공격해 왔다.
이때 이순신은 선두에 서서 지자포를 쏘며 적에 대항했다. 난중일기에는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았더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들도 우리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쯤 들어왔다 물러갔다 하며 화포만 쏘다 자정이 지나자 완전히 물러났다’고 적고 있다.
다음날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토의했다. 이순신은 전투를 앞둔 중요한 시기엔 휘하 장수들과의 작전회의를 중요시 했다. 전쟁기간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하면서도 군사회의를 했는데 벽파진에서도 중요한 전투를 한 후 장수들과 이후의 대책을 논의했던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전라우수영 수사 김억추에 대해 일개 만호직에나 맞는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이순신, 괴로움에 울다

왜수군과 한차례 전투를 벌인 이틀 후인 9일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명절인 중앙절을 맞는다. 그는 상복을 입는 몸이었지만 장수들과 군졸들을 위해 포작이 제주도에서 가져온 소 다섯 마리를 잡아 나눠준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엄한 지도자이면서도 군졸을 사랑한 장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때때로 병사들에게 음식과 술을 내려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을 위무했고 활쏘기나 씨름대회를 열어 진 쪽에서 한턱을 내도록 해 취할 때까지 함께 마시곤 했다. 자신에게 내려진 상금과 음식물을 군졸들에게 베풀 줄 알았던 장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결코 명랑하거나 유쾌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언제나 고뇌하고 아파하고 분노하는 인간 이순신이다. 또 너무도 평범한 아들이자 정이 많은 아버지였다. 백의종군 중 서운하게 한 이들에겐 서운함을 나타내고 잘못한 장수를 보면 분노하고 괴로워했다. 일기에는 나라일과 집안일 때문에 밤늦게까지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들곤 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특히 백의종군 후 조선수군을 다시 책임진 그의 나날은 힘겨움 그 자체였다. 벽파진에서 쓴 11일자 일기에도 이순신은 자신의 신세를 탄식한다. ‘혼자 배위에 앉아서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다음날에도 ‘하루 내내 비가 뿌렸다. 배의 뜸에 앉아서 괴로운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 꿈을 꾸다

그리고 명량대첩 3일전인 13일 일기에 이순신은 꿈 이야기를 한다. ‘꿈이 이상스러웠다. 임진년 크게 승리할 때의 꿈과 대체로 같았다. 무슨 조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이순신이 말한 임진년 꿈은 부산포 해전을 앞둔 시기에 꾼 꿈이다. 부산포 해전을 앞둔 1592년 8월28일 일기에 이순신은 ‘꿈자리가 몹시 어수수선 했다. 새벽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았다. 밤에는 나쁜 꿈인 듯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도리어 길한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에는 꿈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는 새벽꿈을 해석하고 그날그날의 일진을 점치곤 했다. 전쟁의 불확실성과 과중한 책임, 점을 치는 행위로 이를 달래려 했던 것일까. 이순신은 불확실성 때문에 아무리 나쁜 꿈이라도 좋은 식으로 해석하려 했다. 커다란 전투를 앞두고 언짢은 꿈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이순신, 난중일기의 이순신은 이렇듯 불안전하고 연약한 인간 이순신이었다. 

   
▲ 송지 어란과 진도 벽파진, 우수영은 반나절도 안 되는 인접거리다.

대규모 왜선, 어란에 이르다

9월14일 탐방꾼 임준영으로부터 정탐 내용이 들어왔다. ‘적선 200여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포에 들어왔다’는 보고였다. 9월7일에 55척 중 13척이 어란으로 들어왔다는 첩보가 있었던 일주일 후에 200여척 중 55척이 어란에 들어왔다는 보고였다. 대규모적인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첩보였다. 이어 일본군에 사로잡혀 갔다 도망쳐온 김중걸도 이같은 보고를 한다.
난중일기를 보면 김중걸은 9월6일 송지 달마산에서 왜적에 붙잡혀 묶인 채로 왜선에 실렸다. 김중걸이 왜군에 잡힌 9월6일은 이순신이 벽파진에 있던 시기이고 그 다음날 7일은 왜수군이 송지 어란에 진을 친 날이다. 일본 수군이 송지 어란에 오기 전에 이미 해남 육지가 전란에 휩싸였음을 알 수 있다.
왜군의 포로가 된 김중걸은 왜선에서 김해사람을 만난다. 김해사람은 임진년인 1592년에 포로가 된 사람이었다. 5년 넘은 포로생활로 그는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기가 쉬었던 듯 한밤중 왜놈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김중걸에게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조선수군 10여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많이 쏘아 죽이고 배를 불태웠으니 매우 분하다.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힘을 합해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리고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했다”고 전한다. 왜선에서 도망쳐온 김중걸은 이 내용을 이순신에 그대로 전한다. 이순신은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 피난민들을 육지로 대피하도록 한다. 그리고 명량대첩 하루 전인 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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