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량해전은 울돌목의 협수로가 아닌 문내 선두리 양도섬 앞 넓은 바다에서 이뤄졌다. 이순신은 기습을 당해 어떠한 진법도 구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량해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전투였고 이에 이순신은 일기에 하늘이 도왔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⑤명량해전

이순신, 부하들에게 중국의 오자병법 들며 필사즉생 다짐
이순신 전날 꾼 꿈 신의 계시로 해석, 그만큼 승리 갈망

명량해전 하루 전인 15일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15일 난중일기에는 벽파진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우리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다고 적고 있다. 사지인 울돌목을 등에 지고 싸움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울돌목은 암초가 많고 수로가 좁은데다 물살이 빠르고 회오리가 일기에 병법에서 보면 사지(死地)이다. 사지는 전쟁에 불리했을 때 퇴각하는 길마저 막아버린다. 그것은 전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하루 전 우수영이 있던 지금의 선두리 마을 선착장이 있는 양도 뒤편으로 진을 옮긴다. 이순신은 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김으로서 사지인 울돌목을 앞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일본수군이 울돌목의 협수로를 통과해 우수영 앞바다로 나오게 되면 왜군은 사지를 뒤에 두고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순신은 명량대첩 이전에 울돌목의 협수로를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해남을 순시했을 때 우수영에서 4일을 묵은 적이 있다. 또 명량대첩이 일어나기 전 진도 벽파진에서 17일간 머무르면서 울돌목의 지형과 물살 등을 눈 여겨 보았을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은 항상 승리를 거뒀다. 이유는 유리한 지형을 만든 후에 전쟁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순신은 병법에 탁월했고 치밀했다. 우수영 앞에 진을 옮김으로서 이순신은 일단 유리한 지형을 확보했다. 그러나 13척의 배로 수백의 일본수군과 맞서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 맞는 진법이란 게 과연 존재할까.

 

전면전 앞두고 오자병법으로 무장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는데 이는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다짐시킨다. 여기서 이순신이 말한 병법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저술했다는 오자병법이다.
오자병법은 유교 철학에 기초한 정공법 전략의 병법서이다. 도교 철학에 기초한 손자병법이 변칙술과 단기전에 강하다면 오자병법은 사전준비를 강조하는 등 중장기전에 유용한 병법이다. 성격이 강직한데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이순신에겐 변칙술이 강한 손자병법보단 유교에 기초한 오자병법이 맞았을 것이다. 특히 오자병법에는 부대편성, 상황과 지형에 따른 전투방법, 군사의 사기를 올리는 방법 등이 기록돼 있고 장기전에 강한 전법이라 이미 장기전으로 치닫는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이 더 유용했을 병법서였을 것이다.
이순신은 유학의 기초 소양을 바탕으로 각종 병법서와 전쟁사를 공부했다. 손자병법과 류성룡이 재편집한 전수기의십조, 삼국지와 송사를 읽었다. 그리고 현실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현장과 이론을 비교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병법 세계를 만들어갔다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긴 날 이순신은 장수들을 다시 불러놓고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하고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한 군령을 내린다. 이순신은 이미 하루전날 대규모 왜선이 송지 어란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송지 어란과 진도 벽파진에서 전투를 치른바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전투는 일본이 조선수군의 전세를 알아보려 시비를 걸어보는 식의 소규모 전투였다. 50여척의 왜선이 뒤를 따르고 13척 정도가 기습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300여척이 넘는 왜선이 송지 어란에 집결한 것이다. 이는 일본 전 수군이 집결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당연히 이후 전쟁은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순신은 대규모 전투가 일어날 것임을 예견하고 장수들을 단속한 것이다.

 

이순신, 또 꿈을 꾸다

그날 밤 이순신은 또 꿈을 꾼다. ‘밤에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틀 전에도 이순신은 꿈을 꿨는데 ‘꿈이 이상스러웠다. 임진년 크게 승리할 때의 꿈과 대체로 같았다. 무슨 조짐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난중일기에는 총 40번의 꿈 얘기가 나온다. 이중 1597년에 쓴 일기에 18회나 나온다. 
1597년은 이순신에게 많은 일이 벌어진 해다. 한산도에서 2월에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고  4월1일 감옥에서 풀러나 백의종군한 해가 1597년이다.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해 명량해전을 승리로 거둔 것도 그 해이다. 어머니와 아들 면의 죽음을 맞이했던 해도 1597년이다. 이러한 이순신의 처지를 반영하듯 이 해에 이순신은 꿈 이야기를 자주 일기에 기록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순신은 꿈 해석을 조짐이나 계시라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불안전한 꿈도 현실의 전쟁 상황에 반영해 계시로 해석하려 했고 꿈속에서나 꿈 해석에서나 승리를 열망했다. 특히 벽파진과 우수영에서 꾼 꿈은 신의 계시로 보려했다. 대규모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꾼 꿈, 나라의 명운이 자신에게 맡겨진 상황에서 꾼 꿈이라 그는 더욱 신의 계시로 해석하려 했고 이는 이순신이 그만큼 승리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순신, 적에게 에워싸이다

우수영 앞 양도섬 뒤에 진을 친 다음날인 9월16일 이른 아침에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는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옵니다”라고 보고를 한다. 기습을 당한 것이다.
흔히 명량해전을 말하기를 이순신이 좁은 협수로인 명량 즉 울돌목에서 일자진이라는 진법을 미리 쳐놓고 적과 싸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즉 울돌목에서 곧바로 조선수군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왔음을 적고 있다. 이순신이 명량해전 하루 전날 진을 친 곳은 울돌목이 아닌 양도섬 뒤편, 우수영 앞바다였다. 이순신은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수한 후 우수영에 이르기까지 주로 섬 뒤에다 진을 쳤다. 송지 어란은 어불도가 있었고 벽파진도 앞에 섬이 있었다. 철저히 방어중심의 전략이었고 적으로부터 조선수군이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순신은 어란에서도 벽파진에서도 모두 기습을 당했다. 두 곳 모두 기습을 당했지만 이순신이 승리한 것은 적이 쳐들어 올 것을 대비했고 적의 기습과 동시에 선두에서 적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또한 칠천량 해전의 승리에 취한 일본 수군이 조선수군을 쉽게 판단했던 부분도 있었다.

▲ 흔히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일자진을 형성해 적을 막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난중일기 어디에도 일자진의 이야기는 없다.

일자진으로 적을 막지 않았다

병법에서 일자진은 목을 빈틈없이 틀어막을 수 있는 조건에서 효과적인 진형이다. 따라서 협수로인 울돌목에서 이순신이 일자진을 형성했을 것이란 추정은 그동안 일반 설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일자진을 형성해 울돌목의 목을 지키며 조선의 우수한 장거리 포를 발사하고 있는 곳에 과연 일본 수군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군사 전문가들은 울돌목의 협수로엔 5대 이상의 배가 나란히 들어올 수 없다고 본다. 또 울돌목 협수로는 센 물살 때문에 일자진이라는 진형을 형성하기 어렵고 판옥선과 같이 큰 배는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은 곳에서 싸우기 힘들다는 점도 일자진을 부정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실지 이순신은 협수로인 견내량에서도 싸우지 않았다. 견내량에 있는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으로 섬멸했다. 이유는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을 뿐만 아니라 수로 또한 좁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명량해전 날의 난중일기에는 망군으로부터 보고를 받는 후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고 적고 있다. 적이 이미 울돌목을 건너온 후에야 이순신은 닻을 올릴 것을 명령하고 우수영의 넓은 바다로 나갔지만 이미 적선이 조선수군을 에워쌌다는 것이다.
적선이 조선수군의 배를 에워쌌다는 것도 그 장소가 울돌목이 되기 힘들다. 울돌목의 좁은 해로에선 왜선이 조선수군의 배를 에워쌀 수 없기 때문이다. 왜선이 울돌목 협수로를 통과해 우수영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또 조선수군이 적이 올 것을 알고 이미 진형을 형성하고 있었다면 조선 수군 장수들이 겁에 질려 본진에서 800미터 내지 400미터까지 물러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적선이 우리 배를 에워싸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는 800m정도 나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 난중일기에는 왜선 31척이 불에 타고 침몰했다고 적고 있다. 일자진을 형성해 적을 맞았다면 일시에 적의 배가 침몰할 수 없으며 앞선 배가 침몰되고 있는 곳에 뒤의 왜선이 계속해서 밀려올 수 없는 것이다. 기습을 당한 해전, 그래서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하늘이 도왔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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