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척의 배로 133척을 무찌른 명량해전을 기념하기 위한 명량대첩비가 우수영 내에 건립돼 있다.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⑦명량해전-3

명량대첩 이후 해남 완전 유린, 곳곳이 불바다
이순신, 명량해전에서 철쇄 사용하지 않았다

왜수군이 어란에서 출발해 울돌목에 이르렀을 때는 그들의 입장에서 순류인 밀물이었다.
순류를 타고 왔다지만 왜수군의 입장에서도 협수로인 울돌목에서의 전쟁은 원하지 않았다. 많은 배를 소유한 일본의 입장에선 협수로가 아닌 넓은 우수영 앞바다에서의 전투를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들은 이순신의 뛰어난 병법과 용맹함도 알고 있었고 울돌목 사지를 뒤에 두고 전쟁을 치른다는 점도 알고 있었지만 조선수군은 13척의 배, 쉽게 이길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때 일본의 목표는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해 얼마 안되는 조선수군을 섬멸하고 서해안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특히 왜군은 1592년의 제1차 전쟁을 교훈삼아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했다.

 

일본의 목표는 전라도 장악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음력 1월 조선으로 하여금 명(明)을 정벌하는데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1592년 음력 4월13일 약 20만명으로 조선을 침공한 것이 제1차 전쟁인 임진왜란이다. 무방비 상태였던 조선은 10일 만에 경상도,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2달 만에 평양이 함락된다. 선조는 의주로 피신한다.
그런데 1차 전쟁인 임진왜란 때 왜군은 전라도를 온전히 보존시키는 우를 범한다. 전라도는 조선 최대 곡창지대였고 당연히 인구수도 많았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활발히 일어난 의병들은 왜군의 후방을 교란시켰고 이러한 전라도의 안전은 왜군의 기습 걱정 없이 이순신이 해전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줬다.
또 왜군은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한 채 평양까지 진격하는 등 육지 깊숙이 들어가는 우를 범했다.
이순신은 옥포에 이어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해전에서 일본의 수군을 대파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1차 전쟁의 결과는 왜군의 고립이었다. 이로인해 일본과 명나라간의 강화협정이 진행된다.
강화협정 중에 명군은 본국으로 퇴각해 버리고 이후 왜군은 2차 전쟁인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2차 전쟁인 정유재란에서 왜군은 1차 전쟁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바다에선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제해권을 장악하고 육지에선 전라도를 철저히 유린하는 수륙병진 정책을 취한다. 
이를 위해 왜군은 육지에선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남원을 점령하고 전주로 집결한다.
전주를 중심으로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와 전라도를 점령하고 우군은 한양을 목표로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다.
또 바다에선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후 제해권을 장악해 버린다. 1차 전쟁인 임진년 침공과 다르게 보급로를 탄탄히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의 조선의 상황이었다.

 

이순신, 재기할 여유를 갖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칠천량 해전 승리 후 수군을 전라도의 요충지인 남원성 함락에 투입시켜 버린다. 이들은 조선수군이 완전히 궤멸된 것으로 보고 모든 전력을 육지의 전투에 참전시키는 전략상의 우를 범한 것이다. 만약 왜수군이 칠천량 해전 승리 후 서남해안으로 진격해 왔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왜군은 결과적으로 이순신에게 13척의 배나마 다시 재기할 시간적 여유를 주고 만 것이다. 
물론 명량해전을 앞둔 시기 왜수군은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송지 어란과 진도 벽파진의 전투를 통해 조선수군의 배가 고작 13척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칠천량 해전의 승리로 사기도 충전돼 있었다.
그런데 왜수군은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참패를 당해 제해권을 상실하고 만다. 육지에선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에 패해 한양 진출이 막혀 버린다. 이에 일본 육군은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해 울산과 순천으로 남하해 그들의 특기인 성을 쌓고 공성전에 돌입한다. 100년간 진행된 일본의 전국시대는 철저히 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투였다. 성을 빼앗거나 성을 중심으로 농성전을 벌이는 등 성을 놓고 싸운 전투가 전국시대이다. 따라서 일본군은 공성전에 강했다.

▲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철쇄를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난중일기 어디에서 철쇄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명량해전, 철쇄 사용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하늘이 도운 해전이라 말했다. 그만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전투였기에 명량해전은 숱한 이야기를 남긴다. 그 중 하나가 쇠사슬의 사용이다. 우수영에서 쇠사슬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기인했을까.
명량해전에 참여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로 적선을 깨뜨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m정도다. 학자들은 여기에 배를 끄는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m 안팎의 쇠사슬이 필요하다고 밝힌다. 그리고 쇠사슬의 무게를 4톤 정도로 추정한다. 명량해전에 직접 참여한 김억추의 기록은 사실일까. 지금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계산했을 때 도저히 철쇄를 걸 수 없다는 반박이다.
또 이순신이 쇠사슬을 제작하고 이를 설치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도 반박의 이유다. 이순신은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기 전 벽파진에서 17일간 주둔한다. 벽파진 주둔 기간 이순신은 왜수군의 기습을 대비해야 했고 서너번의 전투도 치른다. 도저히 쇠사슬을 제작하고 설치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 왜적을 격파시키는데 그토록 큰 역할을 했던 쇠사슬 이야기를 난중일기에 기록하지 않을리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간략하게 적고 있지만 전투가 있었던 날에 대해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쇠사슬 이야기도 기록했어야 맞다는 것이다.

▲ 명량대첩에선 거북선을 사용하지 않았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기인 사천포해전에 처음 등장했고 한산도 대첩에서 위용을 자랑했다. (명량대첩 전시관에 전시된 거북선)

명량해전, 거북선 없었다

명량대첩 기념관에는 거북선이 전시돼 있다. 영화 명량에서도 거북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선 거북선은 등장하지 않았다.
거북선은 일본 해적과 왜수군의 백병전술에 대비해 개발한 돌격전함이다. 선두에서 적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했고 그 모양은 적을 당황케 해 사기를 꺾는데 도움이 됐다.
이러한 거북선은 제1차 전쟁인 사천전투에서 첫 선을 보인 후 한산도대첩과 부산포해전에서도 활약한다. 그러나 2차 전쟁인 정유재란에선 거북선은 등장하질 않는다. 명량대첩에 참여한 조선수군의 배는 판옥선 13척뿐이었다.

 

일본군, 해남에 보복을 가하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그날 우수영을 떠난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 위태로운 듯하여 무안군 암태면에 있는 당사도로 진을 옮겨 밤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왜수군은 해남에 철저한 보복을 가한다. 명량해전 이후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해남에 불길이 치솟았고 모든 집들은 텅텅 비었다고 적고 있다. 명량해전 이후 우수영을 떠난 이순신은 22일 만에 다시 우수영으로 내려온다. 이때의 난중일기에는 ‘우수영에 이르렀더니 성 안팎에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또 사람의 자취도 없어서 보기에 참담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쳤다’고 적고 있다. 명량해전 승리 후의 난중일기에는 해남의 참담한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돼 있다. 그만큼 해남이 왜수군으로부터 유린을 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때 이순신은 우수영에서 머물지만 이때도 몹시 아팠다. 몸이 불편해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을 새웠다는 것을 일기에 남긴다. 

▲ 명량대첩 공원에는 장흥 회령포에서 이순신과 장수들이 결의하는 장면이 조각상으로 건립돼 있다.

다음호에는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신안군 장산도 편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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