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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후 해남 불바다…이순신 우수영에 다시 오다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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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17  11: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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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명량해전 승리 후 22일 만에 다시 우수영을 찾는다. 이때 난중일기에는 우수영에 이르렀더니 성 안팎에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사람 자취도 없어 보기에 참담했다고 적고 있다.(울돌목 전경)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⑧신안군 장산도 편

왜적 전라도 완전 유린, 해남 유독 피해 커
이순신 가는 곳마다 탄식하며 잠 못 이루다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한 이순신은 같은 날 무안군 암태면에 위치한 당사도로 옮겨 밤을 지냈다.
난중일기에는 우수영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 위태로운 듯하여 무안군 암태면에 있는 당사도로 진을 옮겨 밤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 신안군 지도읍 지도에 이르렀을 때 여러 곳의 현감들과 유지들이 해전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속속 이순신을 찾아온다.

왜적들 해남서 불 지르며 도망

이순신은 명량대첩 승리 후 서해안으로 서진하며 영광 법성포에 이어 전북 옥구군의 고군산도에 도착해 12일을 머문다. 그리고 다시 남하를 시작, 영광 법성포를 거쳐 10월9일 우수영에 다시 온다. 3번째 우수영과의 인연이다. 처음 인연은 명량해전 발발 1년 전 전라도 순시 때이고 다음은 명량해전, 그리고 명량해전 승리 후 22일 만에 우수영을 다시 찾은 것이다. 우수영과 인연을 세 번 맺을 때 이순신의 직위는 모두 삼도수군통제사였다.
다시 찾은 우수영에서 쓴 10월9일 일기에 이순신은 ‘우수영에 이르렀더니 성 안팎에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사람 자취도 없어서 보기에 참담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쳤다 한다’고 적고 있다. 11일 일기에도 ‘해남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분명히 적의 무리가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리라’고 기록했다. 
난중일기에는 명량해전 이후 왜적이 조선 수군을 몹시 겁내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따라서 이순신이 10월9일 다시 우수영을 찾았을 때 해남에 웅크리고 있던 왜군은 조선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도망을 친다. 10월10일 일기에 중군장 김응함이 와서 해남에 있는 적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많이 봤다고 했고 11일 일기에는 탐방꾼 임준영이 와서 해남에 있는 적들이 모두 도망했다는 보고를 한다. 이때 왜적은 연기가 하늘을 덮을 만큼 해남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제1차 전쟁인 임진왜란과 달리 제2차 전쟁인 정유재란에선 해남을 비롯한 전라도가 완전 유린됐음을 보여준다. 특히 명량해전에 패배한 왜군으로 인해 해남을 비롯한 서해 바닷가 마을의 피해가 컸다. 영광 법성포에 이르러 쓴 난중일기에도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의 집과 창고 곳곳에 불을 질렀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시기 전란을 피해 섬으로 피난하는 이들이 많았음도 알 수 있다. 명량해전 다음 날인 17일 이순신이 신안군 지도읍 지도에 이르렀을 때 피난선 300여척이 먼저 와 있었다고 난중일기에는 기록돼 있다. 또 20일 전북 위도에 이르렀을 때도 피난선이 많이 정박돼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 우수영서 아파 밤을 새우다

우수영에 다시 온 이순신은 다음날 북풍으로 배를 띄우지 못해 이곳에서 3일을 머문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날 밤 몸이 아파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밤을 새운다.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은 특히 많이 아팠다. 전쟁에 크게 승리했는데도 많은 날을 식은땀이 나 잠을 이루지 못했고 어떤 날은 끙끙 앓아 종일 밖엘 나가질 못했다.
우수영에서 3일을 머문 이순신은 11일 새벽 2시쯤 바람이 그치자 나팔을 불고 닻을 올리고는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서 해남의 참담함을 정탐군들로부터 듣고 신안군 장산도로 진영을 옮긴다.
울돌목과 장산도까지의 거리는 약 9.3Km. 신안 장산도는 위로는 신안 안좌도, 아래로는 진도, 오른쪽으론 해남, 왼쪽으론 비금·도초·하의·신의도가 촘촘하게 둘러싸여 있는 섬이다. 울돌목은 수심이 깊고 물살 거세기로 유명한 반면 장산도는 수심이 얕고 파도가 잔잔한 것이 특징이다.

 

이순신, 해남에 여러 장수를 보내다

11일 낮 장산도에 도착한 이순신은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배를 숨겨둘만한 곳을 살펴본다. 이날 일기에 ‘동쪽은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 없으나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의 월출산까지 통하고 서쪽으로는 비금도까지 통하여 눈앞이 시원하다’고 적고 있다. 수군이 머물기에 적합하다는 뜻이다. 
신안 장산도에 도착한 날 밤에도 이순신은 아팠다. 비단결 같은 달빛 아래서 괴로워했고 밤엔 식은땀으로 고생한다. 다음날 정탐꾼 임준영으로부터 해남에 있던 왜적이 11일 도망쳤다는 보고를 듣는다. 또한 해남 향리 송언봉과 신용 등이 왜적에 합류해 지방의 사족들을 많이 죽였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에 분개한 이순신은 순천부사 우치적, 금갑만호 이정표, 제포만호 주의수, 당포만호 안이명, 조라포만호 정공청, 군관 임계형, 정상명, 봉좌, 태귀생, 박수환 등을 해남으로 보낸다. 왜적에 붙은 향리를 잡기 위해 꽤나 많은 장수들을 보낸 것이다.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은 군량미 확보와 판옥선 보강 등에 전력하면서도 적에게 붙는 자나 군율을 어긴 자에 대해선 엄격하게 대했다. 난중일기에는 해남의 피해와 함께 왜적에 빌붙은 사람들이 여러 나오는데 이는 그만큼 해남이 전란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순신은 보고를 받은 즉시 이들을 붙잡아 오게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14일, 이순신에게 가장 슬픈 일이 일어난다. 명량해전을 치른지 한 달도 안됐는데 셋째 아들 면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날도 이순신은 꿈을 꾼다. 14일 난중일기에는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 하더니 깨어났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 아들 면의 죽음에 통곡하다

이순신은 아들 면이 죽기 전인 10월1일 명량해전에서 패한 왜군이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가 보복을 할까 걱정돼 큰 아들 회를 집으로 보낸다.
그런데 선몽이었을까. 이순신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꿈을 꾸었다. 아들 면의 꿈을 꾼 날 저녁, 집으로 보냈던 큰 아들 회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때 난중일기에는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이 세상에 누구에게 의존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면의 나이 20세. 이순신에게는 부인 방 씨와의 사이에 아들 셋과 딸 한 명이 있었다. 큰 아들인 회와 둘째인 열은 이순신 휘하에서 일했고 셋째 아들 면은 아산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다. 1차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들 면은 15세였다. 아버지가 전쟁터를 누비고 있는 동안 아들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에게 있어 아들 면의 죽음은 더 가슴 아프고 비통했는지 모른다.

   
▲ 정유년인 1597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아픈 해였다. 따라서 정유년에 쓴 일기는 가슴 아픈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정유년은 가장 가슴 아픈 해였다

1597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아픈 해였다. 한산도에서 체포돼 한양으로 이송되고 백의종군 중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어머니의 상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백의종군의 몸으로 권율장군 진영으로 향해야 했던 슬픈 해였고 칠천량 해전의 참패를 듣던 해도 1597년이었다. 물론 기적과도 같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해이기도 했지만 아들 면의 죽음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아팠다.
면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명량해전 승리 후에도 난중일기에는 승리에 대한 기쁨보단 잠을 이루지 못하고 탄식하는 날이 많았다. 신안 장산도에 도착한 첫 날 밤에도 비단결 같은 달빛 아래서 괴로워했고 밤엔 식은땀으로 고생한다. 아들 면의 소식을 듣기 전날 밤에도 혼자 뱃전에 앉아 시름에 잠기고 밤새 내내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날 일기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고 적고 있다.  
아들의 죽음을 안 다음날에도 이순신은 종일 누웠다 앉았다 하며 뒤척인다. 그런 와중에도 이순신은 정탐꾼인 임홍, 임중형, 박신을 흥양 순천 앞바다로 보낸다. 또 다음날엔 16일 우수사와 미조항 첨사 김응함, 해남현감 유형을 해남으로 보낸다. 16일 일기에 이순신은 내일이 아들이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에는 여러 날 동안 이순신이 아들의 죽음에 통곡하고 아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코피를 한 되 넘게 흘리고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운 내용도 나온다. 아들 면이 죽은지 3일째 되는 날인 16일 해남으로 보냈던 우후 이정충과 금갑 만호, 제포 만호 등이 왜적 13명의 머리를 베고, 적에게 항복한 송원봉 등을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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