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는 호령하는 영웅 이순신이 아닌 아파하고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울돌목에 서 있는 동상은 인간 이순신을 표현한 우리나라 유일한 동상이다.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⑨목포 고하도와 완도 고금도 편

해남서 소나무 베어 배 건조, 군량미도 조달
이순신, 완도 고금도를 수군통제영으로 삼다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은 신안군 장산도에서 17일을 머문다.
이곳에 머물 때도 해남에서의 전투가 심했는지 이때의 난중일기에는 해남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597년 10월19일 일기에는 해남의 윤건 형제가 왜적에 붙었던 자 둘을 붙잡아 왔다고 적고 있다. 22일 일기에는 해남현감이 왜적에 붙었던 윤해, 김언경을 잡아왔고 이들을 처형한 내용이 보인다.
또 다음날에는 미조항 첨사와 해남현감, 강진현감이 해남현에서 군량을 실어오려고 해남으로 갔고 24일 왜의 군량 322섬을 실어왔다고 적고 있다.
이는 해남이 전란의 중심지이면서도 곡창지대여서 왜적의 군량이 해남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 신안 장산도에서 목포 고하도로 진을 옮긴 이후에도 적에 붙였던 해남의 정은부와 김신웅의 처, 왜놈 종들에게 시켜 조선 사람을 죽인 두 명과 양반집 처녀를 욕보인 김애남을 모두 목 베어 효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시기 이순신은 군령도 엄격히 세운다. 우수사의 배가 바람에 떠내려가 바위에 걸려 부서졌다고 하자 병선군관 당언량을 잡아다 곤장 80대를 때렸고, 해남의 아전이 법성포로 피난 갔다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어졌는데 배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배 안의 물건을 빼앗아 갔다는 보고를 받자 그를 중군에 가둔다. 영암 향병장 유장춘이 왜적을 토벌한 일을 보고하지 않아 곤장 50대를 때렸고 장흥 교생 기업이 군량을 훔쳐 실은 죄를 저질러 곤장 30대를 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장수 중 도망을 갔거나 적군을 도운 이들을 처형했다는 기록과 해남 죄인들을 심문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 이순신은 명량해전 승리 후 목포 고하도에서 107일을 머물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배를 건조하며 전력을 정비한다. 고하도에서 쓴 일기에도 해남이 처한 참담함이 자주 나온다.(목포 고하도 모충각)

목포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이순신은 신안군 장산도에서 17일을 머문 후 목포 고하도로 진을 옮긴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창고를 지어 본격적으로 군량을 확보하고 배를 보강한다. 당시 해남엔 소나무가 많았는지 해남에서 소나무를 베어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전라우수사 우후는 나무를 베어 오기 위해 황원장으로 갔고 송응기 등이 산에서 일할 일꾼을 데리고 해남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또 군량미 확보를 위해 영암, 나주 등지로 군사들을 보내 늦은 타작을 해오게 하고 타작을 못하게 막은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주모자들을 처형했다. 이 시기 서남해안 곳곳에서 군량미가 목포 고하도로 들어온다.
목포 고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이순신은 이때도 임준영 등을 통해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데 열심이다. 11월20일 임준영이 와서 완도를 정탐했으나 적의 배는 없다고 전했고 22일에는 장흥에 있던 적이 도망갔다는 보고를 한다. 
목포 고하도에 머문 기간 선조는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내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순신에게 내린 면사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왜적에 협조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을 사형에서 면하라는 면사첩이었다. 
또 선조는 12월5일 채소만을 먹는 이순신에게 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반찬을 내려준다. 이순신은 상중이라 일체 고기를 먹지 않았다. 진도 벽파진에 있을 때도 부하들에겐 소를 잡아 먹을 것을 권하지만 본인은 먹지 않았다. 난중일기에는 ‘경은 내 뜻을 따라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쫓도록 하라’고 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임금이 내려준 고기, 그러나 이순신은 일기에 ‘비통하고 비통하였다’고 적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이다.
목포 고하도는 서남해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영산강의 첫 문 역할을 했다. 바다와 내륙을 동시에 지킬 수 있는 목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인 1597년 10월29일부터 이듬해 완도 고금도로 진영을 옮기기 전인 2월17일까지 107일간 이곳에서 주둔하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배를 건조하며 전력을 재정비했다.

▲ 목포 고하도 모충각의 내부 기념비

 

 

 

 

 

 

 

 

 

 

완도 고금도 수군본영으로 삼다

이순신은 다음해인 1598년 2월17일 완도 고금도로 옮겨 수군 본영으로 삼는다. 한산도에 이은 두 번째 수군본영이다.
완도 고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일곱번째로 큰 섬으로 완도 전체가 자급할 수 있을 정도로 농경지가 발달돼 있었다. 또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한 순천왜성과 가까웠다. 고니시가 누구인가. 절묘한 이간책으로 이순신을 옥에 가두게 한 장본인이다.
완도 고금도는 7년의 전쟁사를 마감하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고금도 주변인 흥양과 광양은 예전부터 둔전을 경영하던 곳이어서 식량 확보에 유리했다.
이순신은 완도 고금도로 이동한 후 군량확보에 더 매진했다. 명나라 수군이 이곳에서 합류해야 했기에 명나라 수군의 군량까지도 확보해야 할 입장이었다. 이순신은 둔전을 경영하고 배 건조에도 열심이었다. 이순신은 목포 고하도에서 배를 늘렸고 이곳에서 더 늘려 70여척으로 최후 전투인 노량해전에 임한다. 군사는 7000여명이 넘게 증원해 한산도 시절에 버금가는 수군을 복원한다.  
그리고 명나라와 수육병진 전략으로 순천에 머물고 있던 고니시를 공략한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곳에서 탈출해 무사히 본국으로 귀국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00년 7월1일 고니시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주도한 서군에 가담해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 참여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패해 은신하다 붙잡혀 참수된다. 
그해 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조선에서 철병을 시작한다. 11월18일 조명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고 19일 왜적을 크게 쳐부쉈지만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은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8년 2월 완도 고금도를 수군 본영으로 삼
 

이순신 노량에 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유해는 11월19일 전사 직후 현재의 남해 충렬사에 3일간 안치돼 있다 11월21일 수군 본영인 고금도로 이장해 수습절차를 거친다. 이후 12월초에 고금도를 떠나 뱃길을 이용해 강진 땅 마량으로 운구된 후 육로를 따라 아산으로 옮겨진다.
이순신에게 있어 완도 고금도는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것이다. 
전쟁기간에 쓴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그날그날의 날씨와 일상사를 적는 글이다. 너무도 간략하게 쓴 일기라 임진왜란 전체를 파악하기란 힘들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웅 이순신이 아닌 식은땀 흘리며 잠 못 이루고 잦은 병치레와 가족들에 대한 걱정, 원균에 대한 미움 등 그날그날 느낀 감정들을 솔직하게 적은 글이 난중일기다. 우리가 일상적인 내용을 일기에 쓰듯 난중일기도 이순신의 일상의 기록이다.
따라서 간략하게 서술된 내용이 많다. 그러면서도 난중일기가 임진왜란 과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전투가 벌어진 날에 대해선 소상히 기록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너줄에 그치던 평상시의 일기와 달리 한산도 대첩과 부산해전, 벽파진에서 일어난 전투와 명량해전에 대해선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이러한 난중일기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상황을 자세히 알게 된다.   
난중일기는 노량해전 이틀 전인 1598년 11월17일 날로 끝을 맺는다.

 

이순신 명량해전 승리까지

명량해전이 일어났던 1597년은 이순신에게 숱한 일들이 일어난 해이다. 그해 2월 한산도 통제영에서 체포돼 옥에 갇히고 4월1일 출옥한다. 출옥 후 백의종군의 길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칠천량 참패로 조선 수군은 무너진다. 아들 면이 죽은 해도 1597년이다. 따라서 1597년에 쓴 일기는 가슴 아픈 대목이 참 많다. 아픔도 고통도 너무 컸던 해라 이순신은 매일 아파 잠 못 이루고 눈물지으며 많은 밤을 보냈다.
그러나 1597년은 이순신과 조선에게 희망을 안겨준 해이기도 하다. 명량대첩의 승리로 조선수준이 재건되고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기간은 4개월이다. 백의종군은 관직과 보직이 박탈당한 채 군에 근무하는 것이지만 결코 졸병의 신분으로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옥에서 나온 날부터 기록한 난중일기를 보면 명목상 죄인 신분이라 해도 처우나 행동에 있어서는 죄인으로의 특별한 억압과 통제를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권율 원수부가 있는 합천 초계까지 가는 과정에서 거처할 장소나 이동 등은 별다른 제약 없이 이뤄졌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에 원수부 관련 인사들과 접촉을 하며 전쟁 상황을 수시로 파악했다.
따라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칠천량 해전으로 참패한 조선수군을 짧은 기간에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13척의 배였지만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을 좌절시켰고 조선수군을 다시 재건시켜 마지막 노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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