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경상도 뚫리면 전라도도 온전치 못한다…정운 부산출격 주장하다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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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31  09: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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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⑩난중일기에 등장한 해남관련 인물들

진사 백진남, 이순신 진영에 머물며 자주 만남
해남현감 유형, 이순신 이어 삼도수군통제사 역임
중국장수 진린 제독 후손들 산이 황조리에 터 잡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해남출신은 정운 장군과 진사 백진남이다. 정운 장군은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이로 옥천면 대산 출신이다. 백진남은 옥천면 송산리 출신으로 백광훈의 아들이다.
해남 출신은 아니지만 현재 해남과 관련된 인물로는 전라우수영 수사를 지낸 김억추와 해남 현감이었던 유형, 중국 장수인 진린 제독이 있다. 김억추와 유형은 해남읍 용정리에 위치한 오충사에, 진린 제독은 산이면 황조별묘에 배향돼 있다.

   
▲ 정운 장군의 묘는 오시미재 가는 길인 양촌제 맞은 편 산에 위치해 있다.

정운장군,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

옥천 대산 출신인 정운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13일 조선을 침략한다. 전라 좌수영에 있던 이순신은 이틀이 지난 15일 경상우수사와 좌수사로부터 왜군의 침략상황을 알게 된다. 또 다음날 16일 원균으로부터 부산포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부산침략 소식이 도착한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유는 이때까지도 전라우수사 수군이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의 지형을 자세히 알지도 못한데다 전라우수사가 없는 전라좌수사 휘하 수군만으로 전투에 참여한다는 데 부담감이 컸다는 의미이다.
이순신은 5월1일에 이르러서야 전라도 수군을 집결시키는데 이때 녹도만호인 정운장군도 참여한다. 다음날인 2일에 이르러서도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 우수영 수군은 오지 않는다.
이에 녹도만호 정운이 이순신을 찾아와 부산 출전을 요구한다. 5월3일 난중일기에는 ‘녹도만호가 찾아와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한 마음 이길길 없다.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고 했다. 중위장 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썼다’고 적고 있다. 즉 정운은 이순신에게 경상도 바다가 뚫리면 전라도도 온전치 못한다는 것과 그때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고 진언한 것이다. 임란초기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로 진격했을 때는 전라 좌수영 수군만을 의지한채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라 우수사인 이억기는 6월4일 당항포 해전부터 합류한다.

이 시기 난중일기에는 정운장군에 대한 활약상이 나오는데 6월7일 옥포해전 일기엔 ‘후부장인 녹도만호 정운은 왜의 중간 배 2척을 쳐부셨다. 당항포 해전에선 녹도 만호 정운도 한 척을 잡았다’고 적고 있다.
또 이순신이 임금에게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엔 ‘한산도 대첩에서 정운은 큰 층각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고 여러 전선이 협공해 그 배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으며 왜적의 머리 셋을 베고 포로로 잡혀있던 사람 2명을 구출했다’란 내용이 보인다.


부산파왜병장에는 ‘녹도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적과 함께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세 번 싸움에 매번 앞장섰다. 부산 싸움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이 쏜 총알에 이마를 뚫려 전사하였다. 지극히 슬프고 가슴 아팠다’고 기록돼 있다.
정운은 1543년 해남군 옥천면 대산에서 태어난다. 하동정씨인 정운은 7세 때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온 정충보국(貞忠報國)이란 글씨가 새겨진 보검을 들고 전쟁놀이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운은 28세 때 무과에 급제해 웅천현감과 제주판관을 거쳐 임진년에 고흥군에 위치한 녹도만호로 부임한다. 전라 좌수사 소속인 녹도만호 부임은 류성룡의 천거로 이뤄졌다. 류성용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인물이다.
정운은 이순신과 함께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등에 참전,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부산포해전 중 쫓기는 적을 추격하다 부산 몰운대에서 적이 쏜 조총에 맞아 사망한다.
정운은 혁혁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공신의 직위를 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해군에서 정운함이 만들었다. 그가 전사한 날인 9월1일이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 운영되고 있다.
정운의 고향인 옥천 대산마을에는 정운장군이 배향된 충절사가 있다. 충절사는 정운이 죽은 후 다시 맞은 임진년(1652년 효종3년)에 건립됐고 숙종 7년인 1681년에 충절사라는 사액이 내려진다.
충절사는 처음 옥천 서원리(충절사라는 서원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에 건립됐다가 그의 태생지인 옥천면 대산으로 옮겨왔다. 정운의 묘는 삼산면에서 오시미재 약수터 사이 우측 도로변 산에 위치한다.

   
▲ 해남읍 용정리 오충사에는 이순신과 전라도 우수사였던 이억기, 해남현감인 유형이 배향돼 있다.

백진남, 난중일기에 다섯번 등장 

송호 백진남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 진중에 피난와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이 신안군 장산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백진남이 4번 찾아온 기록이 있고 목포 당사도에 있을 때도 찾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순신은 1597년 10월9일자 일기에 진사 백진남이 20일과 22일, 26일에도 백진남이 찾아왔고 목포 당사도 주둔시기인 12월2일에도 백진남이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진남은 주로 정조와 김종려와 함께 이순신을 찾아왔다.
이순신은 그날그날 만난 인물들의 이름을 일기에 남겼는데 장수도 아니고 벼슬아치도 아닌 백진남이 이순신을 자유롭게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백진남이 문장가로서 이름이 알려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백진남은 옥봉 백광훈의 아들로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백진남의 문학적 자질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됐고 아들인 백상빈으로 이어졌다. 이들 삼대를 ‘삼세삼절(三世三絶)’이라 불렀다. 백진남은 아버지 옥봉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옥천면 송산리에 사당과 옥봉강당을 세웠다. 
백진남은 15세에 사학(四學)의 과시(課試)에서 시·부(詩賦)에 뛰어나 이이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정유재란 시 이순신 진중에 피난 와 있을 때 명나라 장수 계금피·승덕 등은 그의 시초(詩草)를 보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왔을 때 관반(館伴 서울에 묵고 있는 외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일시로 임명한 정삼품 벼슬) 유근의 천거로 백의종사했다.
송호 백진남은 말년에 삼산면 송정리 뒷산에 송호정이라는 별서를 짓고 시인문객들과 교류했다고 하며 저서로『송호유고』1권이 있다.

   
▲ 정운 장군의 충절을 기린 충신문은 그의 고향인 옥천면 대산리에 건립돼 있다.

우수사 이억기, 오충사에 배향

이억기는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 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우수사를 맡았으며 임진왜란 발발 2개월이 다된 6월4일에 전라좌수사인 이순신 부대에 합류한다. 임란초기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해 이순신이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를 애타게 기다렸는데도 왜 그가 늦게 합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순신은 이억기를 기다리다 전쟁발발 20일 후에야 부산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억기가 합류한 날인 6월4일 난중일기를 보면 ‘정오에 우수사가 탄 배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진중의 장병들 중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병력을 합치고 새로이 약속을 하고는 다음날 당항포에 이르러 싸웠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을 비롯한 전라좌수사 소속 장병들이 얼마나 전라우수사 수군들을 기다렸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이억기는 합류과 동시에 당항포 해전에 참여한다.
한양에서 출생한 이억기는 전주이씨로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 뒤 무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북방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경흥부사로 임명돼 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91년(선조 24) 순천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수사가 돼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합세해 당항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 해전에서 왜적을 격파하는데 공헌했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자 이항복·김명원 등 조정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 무죄를 변론하기도 했다. 이억기는 아쉽게도 통제사 원균 휘하로 참여한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했다.
이억기는 당항포해전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공적을 세웠으나 임란초기인 옥포·사천·당포해전 등의 초기 해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관계로, 임진왜란 후 공신책정 때 선무공신 2등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1600년 여수의 충민사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됐고 해남엔 읍 용정리 오충사에 배향돼 있다.


유형, 이순신 이어 삼도수군통제사

해남현감이었던 유형은 공주 출신으로 명량대첩 이후의 난중일기에 많이 등장한다. 유형은 해남에서 군량을 확보하고 왜적에 붙은 자들을 잡아오는 등의 역할을 한다.
유형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강화에서 활동하다 의주 행재소에서 선전관으로 임명된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해 신설된 훈련도감에서 군사조련에 힘쓰다 해남현감으로 부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이순신 막료로 수군재건에 노력했고 남해 앞바다 전투에서는 명나라 제독 진린과 이순신을 곤경에서 구하기도 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해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에 발탁됐고 1600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이어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또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9년 광해군 1년 때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임했고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에 이어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사망한다.
유형은 이순신, 이억기와 함께 해남읍 용정리 오충사에 배향돼 있다.

   
▲ 진린 도독 후손들은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으로 망명해 산이면 황조리에 뿌리를 내린다.(황조별묘)

진린장군 후손들 산이에 터 잡다

중국 장수인 진린 도독은 명량대첩 이후 난중일기에 등장한다. 진린은 중국 광둥지방 출신의 무관이자 도독의 신분으로 정유재란 때 5000여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완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이순신을 존경하게 됐다.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보고해 만력제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을 보내는데 일조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그의 손자 진영소는 난징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했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완도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해남으로 이거해 정착하면서 해남에 광동진씨의 뿌리를 내린다. 산이면 황조리에는 진린 제독을 배향한 황조별묘가 있다. 또 황제 밑에서 공을 세운 후손들이 정착한 곳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황조라 했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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