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위독하셔서 오래 버티시기 힘들듯 합니다. 아버지께서 유언장에 이름을 남겨 놓으신 분들께 연락드립니다.」
그 분과의 인연은 2013년 1월쯤에 시작되었습니다.
전남교육신문에 6.5%라는 수필이 실렸습니다. 6.5%는 췌장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이며 본인이 바로 췌장암 환자라는 이야기, 남들은 자연인처럼 산으로 들어가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지만 마지막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호흡하며 인생의 방점을 찍고 싶다는 유언장 같은 고백이었습니다. 진솔한 고백으로 엮어진 그분의 수필에 끌려 수소문 끝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주고받았던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정이 쌓였고 그 분의 청(請)으로 망년우(忘年友)의 연을 맺었습니다. 6.5%라는 가녀린 희망을 온전히 그 분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는 옛말처럼 그 분은 달랑 그림자 하나만을 데리고 사시던 외로움의 교과서 같은 분이셨습니다.
“김 선생님, 우리 연애하는 거요?”
이렇게 물으시던 때가 나무들이 겨울을 예감하고 시련을 준비하던 그해 가을이었습니다. 몇 번의 계절이 더 바뀌길 소원했습니다. 꽃이 질 때 뚝 떨어지면 좋으련만 애잔하게 말라비틀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따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말씀은 하지 못해도 아직 소리를 들으실 수 있다기에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김 선배님, 선배님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으~~ 응.”
힘들게 전화를 받은 후 천명(天命)은 그 분의 고통을 거두었습니다.
그 분은 수필가였습니다. 아날로그적 삶이 몸에 배어 저에게 보내 온 편지도 손 글씨로 보내왔습니다.
괴테는 ‘편지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까운 삶의 숨결’이라고 했는가 하면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은 ‘편지는 키스보다 더 강하게 두 영혼을 결합해 준다.’고 하지 않던가요?
병실에 누워 계시는 그 분에게 손 편지를 보내기 위해 100장의 편지 봉투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하루건너 편지를 보내며 100장의 편지 봉투가 모두 소진되고 다시 100장의 봉투를 살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 분이 숨을 거두기 얼마 전에 보내 온 손 편지 글의 일부입니다,
‘저의 빈 칸을 채워주신 자상한 배려 잊지 않겠습니다. 편지를 받았습니다. 늙은이가 열다섯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행복합니다. 잔잔한 설레임 같은 것! 이 희열이 이승을 떠날 때까지 만이라도….’
생전에 그 분의 얼굴을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전화로, 편지로 가슴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따님으로부터 유언장을 건네받았습니다.
‘모두 가슴에 담고 갈 고마운 분들’이라는 제목 아래 적어놓으신 15명의 이름 중에 제 이름도 중간쯤에 적혀 있었습니다.
안개처럼 풀꽃처럼 잠깐 머물다 가는 세상에서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 이름을 기억해 준 그 분이 고마웠습니다.
제 서랍엔 미처 부치지 못한 서너 장의 편지봉투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서랍을 열 때마다 기억의 저편에서 그 분이 고운 무늬로 살아납니다.
인연이란 에밀레종 소리 같은 울림, 누군가의 지문이 묻은 손 편지 같은 것.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모르고, 보통사람은 인연일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답니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