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천(전 해남동초 교사)

벌초 시즌이다. 여기저기서 예초기(刈草機) 소리가 들린다.
매년, 추석이 한 달여 남았을 때부터 벌초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묘지의 터가 넓고 해마다 잡풀과 잡목들이 땅뺏기를 하듯 묘소 주변을 점령해 들어오는 바람에  거센 잡초와 잡목을 잘라내기가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 동무도 없이 외로운 벌초를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벌초 대행 업자에게 벌초를 맡기기도 한다지만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조상의 묘소를 남에게 맡긴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서투르지만 매년 벌초를 해오고 있다. 
벌초를 하고 나면 하루 이틀은 벌초 후 몸살을 앓는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사용해 보는 예초기가 생경하기 때문이다.


아침 6시, 날이 밝기가 무섭게 벌초 길에 나섰다.
예초기, 물, 에프킬라, 낫, 보호 장구는 어제 밤에 챙겨 놓았다. 쯔쯔가무시 진드기를 염려해 등산화와 긴 옷을 입었다.
묘소엔 풀이 허리만큼 자랐다. 허리만큼 자란 것은 자란 것이려니와 저희들끼리 얽히고 설켜같은 자리를 두세 번 정도 잘라야 할 지경이다.
거기에다가 도토리나무처럼 키 작은 나무들이 작년보다 훨씬 많이 퍼져 있다. 주변엔 키 큰 나무들이 울을 두르고 있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벌초를 시작했다.
남들은 매끈하게 잘도 깎아 놓았더니만 예초기 작업이 쉽지가 않다.
예초기가 비닐이나 풀에 감기고 살을 파고들 듯 땅에 처박혀 힘을 잃기도 하고 멈췄던 기계가 다시 굉음을 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기를 한나절 만에 6봉의 묘지 벌초를 완료했다.
솜씨가 없어서 매끈하지 못하고 울퉁불퉁하다.


나란히 누워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묘지 앞에 섰다.
깎아놓은 봉분(封墳)을 보며 생전(生前)에 머리를 깎아 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요즘엔 ‘바리깡’이라고 부르는 전기 기계로 머리를 자르지만 당시의 ‘머리 깎는 기계’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동작으로 양날을 움직여 머리를 자르는 기계였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자라면 아버지께서는 의례히 처마 밑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머리를 깎아주시곤 했다. 그런데 그놈의 ‘머리 깎는 기계’도 나이가 들어 닳았던지 자꾸만 머리를 꼬집어대는 바람에 머리를 다 깎기까지 앉아있기가 고역이였다. 머리를 흔들고 몸을 비틀어대면 아버지께서는 머리를 툭 치시며 ‘가만히 안 있어?’하고 협박을 하곤 하셨다.
머리 깎는 몸살을 앓고 나면 “와따, 개원하다. 우리 아들 잘 생겠다. 뒤꼭지가 참 이쁘구만.” 이런 말을 습관처럼 하셨다.
그땐 아버지께서 머리를 깎아 주시는 것이 참으로 싫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발관에서 보기 좋게 잘 다듬어 오는 데 아버지께서 깎아주신 내 머리는 어쩐지 촌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머리를 깎아 주시던 아버지는 여기 땅 밑에 묻혀 계신다. 묻히신 시간이 길어 유골이나 남아 있을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투병하시던 모습, 초췌한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어미 잃은 송아지마냥 마음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어머니도 불러 봤다. 한 줄기 소슬바람이 허전함을 더했다.
벌초는 묘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돌본다는 의미를 넘어서 선조들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일 것이고 핏줄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기회도 될 것이다.
말끔히 정리해 놓은 묘소를 식구들이 함께 둘러보며 우애를 다지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추석이다.
명절을 맞아 모두들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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