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해남동초 교사)

여년 묵은 김치 같은 나의 길벗, 무상세월 해촌(海村)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얼마 동안 잊고 살았던 토박이말이 살아납니다.
“성님, 그 새다구로 들어오시오.”
“새다구가 뭣이당가? 이 사람아!”
새다구라… 그건 ‘사이’라는 토박이말입니다.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업데이트되는 해남공공도서관 팟캐스트 ‘옴메, 도서관이 말을 해야’를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옴마, 땅끝에서도 방송 해부러야. 구수한 사투리가 반가워  부러.’ 
사투리라는 표현은 토박이말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토박이말은 생활 속에서 자생된 생활어이며 입과 입을 이어 온 말들입니다. 저는 토박이말을 좀 더 고상하게 ‘고향의 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향은 태(胎)를 묻은 곳입니다. 고향은 태와 뼈, 탄생과 죽음을 연결하는 회억의 땅, 조상의 숨결이 어리고 삶의 때가 묻은 땅입니다. 고향은 언제나 낙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향은 땅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바탕에 수를 놓아가는 인생, 그 가운데 고향은 가장 오래된 무늬입니다.
그곳엔 고향의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표준말과 고향의 말이 있습니다. 표준어란 한 나라에서 공용어로 쓰는 규범으로서의 언어를 말합니다. 고향의 말이란 내가 태어나서 자란 땅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받은 말입니다. 표준어엔 공용의 규범이라는 규격은 있을는지 몰라도 고향 같은 따스함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아부지’하면 어릴 적, 당시엔 참으로 귀했던 공을 사다 주시던 따스한 손길이 생각나고 같은 말일지라도 ‘아버지’는 어쩐지 교과서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제’와 ‘아저씨’는 같은 의미의 말이지만 ‘아제’라고 하면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시던 이웃집 어른의 느낌이 들고 ‘아저씨’라고 하면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이 제 가슴입니다.
엊그제 〇〇의원에 들렀습니다. 병원엔 항상 노인분들이 많습니다. 원장님이 진료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원장님의 말씀이 참 정감 있게 들렸습니다. 원장님께서 해남 토박이말을 연습했는지, 아니면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우셨는지, 순수 토박이말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짝퉁 표현이 오히려 재미있었습니다.
“할머니, 이 정도면 건강한 편 이당께. 염려 마러어”
고향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런 말들이 얼마나 정감 있고 맛스런지요.
세월에 묻혀 시나브로 잊혀져 가는 고향의 말이 그립습니다.
‘뽀짝 붙어서 오그라이’, ‘냉갈 무지하게 나네’, ‘배아지가 따땃하네.’ ‘옴메, 귄있는 거’
고향의 말은 우리가 품고 다니는 고향이 아닐는지요. 누가 우리 고향의 말을 사투리라 비하했을까요? 우리 고향에선 고향의 말이 표준어입니다.
세월에 편승해 사라져 가는 고향의 말들이 아깝습니다. 아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고향의 말’은 퍼석퍼석한 부스러기 되어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국의 땅을 지킬 때에는 누구나 군인이 되고 조국의 말을 지킬 때에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던 이어령 님의 말처럼 고향의 말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가 고향시인입니다.
“해 떨어질라문 안직 멀었네. 싸묵싸묵 하세!”
세상에 귀빠진 날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고향의 말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혼을 간직하고 사는 것 아닐까요? 고향의 말은 사투리가 아닙니다. ‘깜놀’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줄임말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정이 가득한 말이죠. 자고 나면 신조어가 생겨나는 언어의 인플레 시대에서 우리 핏속을 돌아다니는 말은 토박이말입니다.
“누가 우리 고향의 말을 사투리라고 한당가? 그르케 말하믄 겁나게 기분 나쁘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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