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무형유산을 찾는 대장정     장미례(2001 제13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 화원면 장재리 출신인 장미례 명창은 소리꾼으로 유명한 아버지 장천문 씨를 닮아 어릴 때부터 소리 잘하는 아이로 유명세를 탔다.

어머니의 반대로 결혼 후 소리꾼의 길
이난초 명창에게 8개월 배워 대통령상

 

아버지는 유명한 소리꾼이었다. 소리뿐만 아니라 북과 징, 아쟁, 퉁소 등 모든 전통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아버지 곁에는 언제나 축음기와 유성기가 있었다. 우린 자연스럽게 축음기와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머니는 그 소리를 정말 싫어했다. 누가 좋아했겠는가. 소리에 빠져 사시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목화장사를 하셨기에 여러 곳을 다니셨다. 또 작은아버지가 여수에서 운영하는 염전 일도 도우셨다. 그래서 우린 아버지의 얼굴을 매일 볼 수는 없었지만 배고픈 시절은 겪지 않았고 딸들이지만 모두 초등교육을 받았다.
우리 집은 논이 없었다. 밭농사만 지었기에 어머니의 고생은 컸다. 특히 아버지는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어릴 때부터 집 낙성식 때 소리
 
어머니는 그토록 싫어했지만 우린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도 좋았다. 엄마만 없으면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심청가와 춘향가를 따라 불렀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난 이미 춘향가와 심청가를 모두 외워 부를 정도였다. 7세 때부터 나는 소리를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
당시는 집 낙성식이 마을에선 큰 행사였다. 집 낙성식이 있는 날에는 반드시 불려 나갔다. 인근 마을뿐 아니라 화원면의 여러 마을을 갔다.
아버지는 내가 소리를 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셨다. 소리꾼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소리 한 대목 부르는 것조차 반대했다. 남의 동네 집 낙성식 때 불려 나가는 딸의 모습도 좋아 할 리 없었지만 어르신들이 사정하니 어쩔 수 없이 나를 보내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시로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어린 마음에도 혼자 농사를 짓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떠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며 10대 때를 보냈다.

각종 콩쿨대회 상 휩쓸어

문화시설이 없었던 그때에는 콩쿨대회가 가장 큰 문화행사였다. 16세 때부터 각종 콩쿨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었다. 이미자 노래를 어찌나 구성지게 잘 불렀는지, 어린 이미자로 통했다. 여자의 인생, 기러기 아빠, 동백 아가씨 등 언제나 이미자 노래만 불렀다.
어머니는 콩쿨대회에 나가 이미자 노래를 부르는 것은 허락했다. 어머니 입장에선 판소리만 아니면 됐던 것이다. 콩쿨대회에서 오리엔트시계 등 집 살림도구는 죄다 상으로 받았다. 남들은 가수로 나가보라고 했지만 집이 가난해 그 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6~18세 때까지 해남에서 열린 콩쿨대회는 모두 나갔다.

돈 벌어 부모님께 논 사드리고

나는 20세까지 화원 장재리에서 어머니 농사를 도우며 살았다.
외지로 나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왜 그렇게 어머니가 늙어 보이고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농사일을 전혀 하지 않으셨기에 내가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물론 소리는 계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 눈치 때문에 몰래 소리를 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나이라 내 신세가 슬펐다. 어머니를 보면 더 그랬다.
당시는 논이 재산의 척도였다. 돈을 벌어서 논을 사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광주 양동 복개상가에 취직을 했다. 강원상회였는데 이곳에서 3년간 일했다. 옷 가게였기에 제고가 된 옷을 입고 숙식도 해결됐기에 월급은 고스란히 모을 수 있었다. 3년간 일한 돈으로 논 여섯 마지기를 사 부모님께 선물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부탁해 서울 신길동에 통닭집을 냈다. 정말 장사가 잘됐다. 가게를 서울 구로공단으로 옮겼을 때도 장사가 잘돼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때 내 나이 30세였다. 결혼 다음 해에 딸이 태어났는데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어머니가 계신 목포로 와야 했다. 친정어머니에게 딸을 맡기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오빠 집인 목포에 기거하고 계셨다.
식당 등에서 일을 했다. 식당에서 일을 한 이유는 가정살림도 보태야 했지만 돈을 벌어 소리를 배우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안애란 명창에게 첫 사사

그러던 어느 날 목포시립국악원에 몸을 담고 있는 안애란 명창이 나를 찾아왔다. 너는 소질이 있으니 3개월만 정식 소리를 배우면 얼마든지 무대에 설 수 있다며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안애란 명창의 말대로 딱 3개월간 소리를 배운 후 안 명창과 함께 각종 공연과 행사장 무대에 섰다. 여기저기에 매일 불려 다닐 만큼 소리꾼이 직업이 된 것이다. 안애란 명창은 나의 첫 스승이었으며 그에게서 춘향가 전 대목을 배웠고 이후 주인숙 명창을 만나 서편제 소리인 심청가를 배웠다.
정식적으로 소리를 배우면서 상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무작정 이난초 명창을 찾아갔다. 목포에서 광주를 오가며 이난초 명창에게 강도근제 동편제 소리를 배웠다.

이난초 명창 덕분에 대통령상

이때 나의 나이 47세였고 이난초 명창은 40대 초반이었다. 이 명창에게 8개월간 소리를 배운 후 2001년 제13회 목포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대망의 대통령상을 받았다. 평소 그토록 좋아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상이라 더 좋았다.
국악대회는 2번 출전했다. 첫 대회는 여수진남 국악대회였는데 제일 큰 상이 국무총리상이었다. 이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두번째 도전이 목포국악대전이었고 이 대회는 대통령상이 걸려있었다. 대통령상이 걸린 대회 첫 출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아마 내가 유일했을 것이다.
이난초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던 8개월은 고막이 터질 만큼 열심히 소리를 했다. 아픈 허리를 움켜쥐고 새벽까지 소리를 했다.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이난초 명창은 정말 소리를 잘 가르쳤고 제자 사랑이 대단했다.
목포대회 본선에서 춘향가 중 춘향이가 매 맞는 대목을 불렀는데 심사위원들로부터 성음이 너무 좋아 따를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었다. 대통령상 수상 이후 목포에 미례판소리연구소를 차려 제자들을 양성했다.

소리하다 무대에서 쓰러져

나는 소리에 미쳐 살았다. 늦은 나이에 정식으로 소리를 배워서인지 오직 소리에 매진했다.
뇌에 이상이 생기고 허리에 무리가 따랐다. 목포예총에서 마련한 찾아가는 국악공연 도중 무대에서 쓰려져 버렸다. 박지원 국회의원과 목포 시장 등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를 하다 쓰려져 버린 것이다.
나는 소리를 하면서 척추 수술만 13번이나 했다. 수술 후 조금만 괜찮아지면 다시 소리를 시작했는데 이젠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다.
서울에서 수술을 받은 후 지금은 목포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모든 소리꾼들의 꿈인 완창발표회 기회를 얻질 못한 것이다.
딸도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엄마인 나에 이어 이난초 명창에게 강도근제 판소리를 사사받고 있다.

온 집안 식구가 예술인

나는 2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형제들 모두 예능에 소질이 있었다. 큰 오빠는 목포에서 음악학원을 했고 둘째 언니는 한국무용을 했다. 셋째 언니는 지금도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또 큰언니 손자는 소리와 기악을 전공했고 둘째  언니 딸인 김미숙은 판소리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셋째 언니 딸은 내가 운영했던 미례판소리연구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소리가 3대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몸이 성할 때는 해남의 각종 공연장에 섰다. 제자들 데리고 국악경연대회에서 참여했다. 나의 소원은 딸 이철홍이 대통령상을 받는 것이다. 지난 10월1일 남원에서 완창발표회가 있었는데 가질 못했다.
장미례(64) 명창은 화원면 장재리 출신으로 현재 목포의 한 요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장미례 명창과의 인터뷰 내용을 1인칭으로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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