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무형유산을 찾는 대장정     김미숙(제11회 목포전국명창대회 대통령상)

▲ 김미숙 명창은 소리꾼으로도 유명하지만 남도민요 연구 등 다양한 저술작업으로 국악계 이론가로도 통한다.

화원 마산, 국악 집안 출신

화원면 마산리 출신인 김미숙 명창(57)은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남도민요 전반에 대해 분석한 논문과 책 등을 출간하며 국악계의 이론가로 우뚝 선 이다.  
김미숙 명창은 국악 집안 출신이다. 외할아버지인 장천문은 화원면에서 알아주던 소리꾼이었다. 소리뿐만 아니라 아쟁과 퉁소, 북, 징 등 모든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뤘고 그의 영향으로 자녀들도 소리와 무용 등에 재능을 보였다.
김 명창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국무용을 했다. 어머니는 1960~1970년대 목포시립국악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목포의 국악계를 이끌었다. 신영희 명창은 남성 못지않은 배포를 가진 그 시대의 맹렬 여성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를 닮아서일까. 김미숙 명창의 삶도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19세 때 김소희 명창 만나 입문

김미숙 명창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 고전 무용을 했다. 그러다 19세 때 서울로 상경해 김소희 명창을 만나면서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된다.
판소리 분야의 전설적 인물인 김소희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이다. 그러나 김소희 스승을 처음 만났을 때 소리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정도로만 들었지 큰 관심을 갖진 않았고 소리도 건성건성 배웠다. 19세 나이, 친구들과 수다 떨며 놀고 싶은 나이 아닌가. 김미숙 명창도 그랬다.
그렇게 해를 넘기던 어느 봄날, 스승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들려온 소리, 그 소리는 온몸에 전율을 일게 했다. 안향련 선배가 춘향가 중 옥중가를 배우고 있던 중이었다.
안향련 선배는 훗날 천재박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기예가 뛰어난 명창이었다. 일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뛰었다. 이때부터 판소리는 김미숙 명창의 삶의 일부가 됐다.
이후 판소리를 온몸으로 배웠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전수 과정을 밟아 김소희 춘향가 이수자가 됐다.
1995년 김소희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였던 신영희 선생에게 못다 한 소리를 이어갔다. 신영희 명창은 김소희 명창의 대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이다.
김미숙 명창은 신영희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1999년 목포전국명창대회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수상, 명창대열에 합류한다.

소리꾼에서 국악 이론가로 성장
 
김미숙 명창은 김소희 스승과의 인연으로 자신의 삶의 이정표가 확립됐다고 말한다.
김소희 명창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후 박초선, 오정숙, 안숙선, 성창순, 신영희, 박양덕, 오정해 등 한국 판소리계의 거장들을 길러낸 명창 중 명창이다.
특히 거문고와 양금, 가야금 등 각종 악기 연주에 뛰어났고 춤도 잘 췄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룰 정도의 기량을 지녀 국전에 입선도 했다.
배움을 중요시했던 김소희 명창은 1917년생인데도 고등교육을 받았고 따라서 제자들에게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국악인이 될 것을 늘상 주문했다.
이에 제자였던 김동애 명창이 늦은 나이에 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시작했고 스승인 김소희 명창은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김동애 명창은 너무도 많은 일을 하다 과로로 요절했고 이에 김소희 명창의 상심은 너무도 컸다고 한다.
김소희 명창이 세상을 떠난 한참 후인 늦은 나이에 김미숙 명창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중앙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한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었을까. 김 명창은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석사논문은「남도창 신민요 연구」였다.
석사학위 논문으로 그는 소리꾼에서 학자로, 연구가로 변모를 꾀했을 뿐 아니라 우리 국악계에 보석 같은 집필을 시작한다.

남도민요 연구에 매진

남도민요는 여태까지 악보에 약간의 해설이 곁들어진 단행본만 존재했지 남도민요 전반을 분석한 저서는 없었다. 이에 김 명창은 1950년 이후 나온 작곡가가 분명한 남도 신민요를 대상으로 석사논문을 완성했다.
김 명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도민요 전반에 걸친 연구로 확대,「악보와 뜻풀이가 있는 해설 남도민요」책을 발간한다. 이 책에는 남도민요가 거의 빠짐없이 수록돼 있는데 크게 전래민요와 신민요로 나눠 기술하고 있다.
전래민요에는 토속민요에서 비롯된 곡과 예부터 전해 내려온 통속민요, 판소리에서 비롯된 곡과 잡가 등이 포함돼 있다.
신민요에는 작곡자가 알려진 곡들과 창극이나 여성국극을 위해 창작된 곡들, 그리고 작자미상이지만 신민요로 추정되는 곡들을 포함시켰다.
각 곡에는 해당 곡의 유래 및 사설의 주제에 대한 해설과 장단, 리듬, 음조직, 선율의 특징 등에 대한 음악분석 그리고 악보를 수록했다.
김 명창은 이 책을 발간하기 위해 3년간 관련서적과 논문, 관련기사를 검토했고 여러 명창들과 각 분야 전문가들을 만나는 작업을 병행했다.
민요를 그냥 부를 때와 그것을 일일이 악보에 옮김으로써 구조적인 이해를 했을 때의 차이는 매우 컸다. 김 명창은 그 차이를 알면 알수록, 깊이가 깊어질수록 민요를 더욱 가슴으로 느끼며 부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또 이러한 과정에서 실기와 이론이 함께해야 진정한 소리꾼으로 성장할 수 있음도 절실히 느꼈다.
저서 발간은 작곡가와 곡의 유래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노래가사에 대한 뜻풀이에 많은 자료가 필요했다. 특히 어려운 한자나 한시, 그리고 중국의 고사나 불교경전에서 인용된 내용들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 시조집이나 국악에 관련된 서적, 중국의 한시를 수록한 책뿐 아니라 국악대사전, 국어사전 등 많은 참고문헌이 그의 책상을 가득 채웠다.
어떤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점에서 조선시대 옛 시집과 중국 당송시대의 유명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자료 찾는 일로 종일 시간을 보냈다.
비록 힘든 과정이었지만 하나씩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 구전돼 오는 동안 와전된 가사를 잡아가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스승의 소리연구로 박사학위

김 명창의 학구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욕구, 학문이 갖는 마력, 그 속에서 빠져나오기는 논문 제목을 정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함 보단 더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 다음엔 박사학위에 도전했다.
박사논문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만정 김소희 스승에 대한 연구였다. 논문 제목을「김소희 바디 춘향가의 사설구성과 음악적 특징」으로 정하고 만정제 춘향가 전 바탕을 채보해 음악적 분석을 시도했다.
그리고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음원에는 없지만 제자들에게 전수되고 있는 쑥대머리를 비롯해 옥중가 중 세 대목과 정정렬제 춘향편지의 악보를 추가해「김소희 바디 춘향가의 사설구성과 음악적 특징」이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김미숙 명창은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소리꾼으로 살면서, 또 대학원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국악의 이론정립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 저서 발간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소리도 아는 만큼 느끼고 아는 만큼 음정 조율도 감성도 커진다는 신조, 그리고 판소리나 남도민요를 공부하는 이들이 유래나 사설, 음악적 특징에 대해 이해하면 더 큰 소리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필요성을 안 것이다.
따라서 본인이 배워온 지식을 바탕으로 책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생겼고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남도민요의 유래와 가사해설, 음악분석에 대한 연구도 진행할 수 있었다.


고향 해남은 나의 긍지

김 명창은 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대학 특강과 공연, 공부, 저술작업 등 그러나 힘든 만큼 보람된 일이라며 자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아름다운 예향의 고장 해남에서 태어난 것도 큰 축복이라고 한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고 말한 김 명창은 지식을 바탕으로 더 크고 아름다운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김미숙 명창은 1960년 고전무용을 하던 어머니와 직업군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인 관계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강원도와 목포 등 많은 도시를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남에 대한 기억은 화원 마산리에서 외가인 화원 장재를 오가며 진달래꽃 따 먹던 일, 산에 고사리 꺾으러 고모나 이모를 따라다녔던 기억들, 또 아궁이 속 고구마와 가마솥의 누룽지 등으로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