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무형유산을 찾는 대장정     정철호(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 청강 정철호 선생이 창시한 아쟁산조는 정철호 아쟁으로 불리며 민속분야에서 없어서는 안될 악기로 자리 잡았고 대학 국악과의 전공과목으로도 지정됐다.

북평면 서홍 세습무 집안서 태어난 명인
김대중의 ‘옥중단시’도 작곡해 무대 공연

 

이미 세상을 떠난 임방울 명창에 이어 청강 정철호 선생은 우리 국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판소리와 고법, 아쟁산조, 국악작곡 등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청강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이다. 청강은 고법분야 인간문화재지만 판소리와 아쟁산조, 국악작곡 분야에서도 인간문화재 이상의 역할과 재능을 가진 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북평면 서홍리 세습무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인 정달현은 신청(神廳)계원으로 신청에서 굿과 음악, 춤 등을 가르쳤고 가야금과 피리 대금 등 기악의 명인으로도 통했다.
조부인 정희연 역시 피리와 젓대, 징, 장구 등의 명인이었다. 또 아버지 정치조는 김달천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워 시골에서 쾌나 알려진 소리꾼이었고 꽹과리와 설장고 등의 악기에서도 명인으로 통했다.
그의 할머니도 알아주는 세습무였다.

선조들의 예술 끼 물려받아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청강은 악사들의 연주와 할머니의 굿 사설을 들으며 자랐다.
그의 집은 참으로 가난했다. 아버지는 술과 아편으로 세월을 보냈고 할머니가 가정살림을 꾸렸다. 대신 청강은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그의 본격적인 불행은 10세 때 시작된다. 집안 살림을 도맡았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나마 의지했던 아버지마저 세 번째 맞은 새어머니를 따라 처가댁으로 들어간다.
홀로 된 그는 일본인 노부부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3일 후에 새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세상을 뜬다.
고아가 된 청강은 어릴 적 그를 떠났던 생모를 찾아 진도로 간다.
어머니는 면장 사모님이 돼 있었지만 그곳의 삶은 편치 않았다. 결국 이웃에 사는 형을 따라 함경남도 흥남으로 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카바이드 공장에 취직한다. 너무도 고된 일과 악취 때문에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그는 장티푸스에 전염돼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의 나이 12살, 장티푸스를 앓다 쓰러지면 아무도 몰래 버려질 수 있다는 우려에 함바집 주인은 노잣돈을 쥐어주며 그곳을 빨리 떠나라고 말한다. 완행버스를 타고 셋째 고모가 사는 북평면 동해리로 오게 되지만 그는 오는 도중 들녘에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어버린다. 마침 소달구지를 끌고 가던 동네 사람에게 발견돼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고모는 시어머니와 8남매를 건사해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그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여기서 그는 야학에 다니며 그토록 목말라했던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14살 되던 해에 그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임방울 선생의 목포공연이 적힌 포스터를 보여준 것이다.

14세 때 임방울 선생과 인연

그는 무작정 목포로 향했고 임방울 선생이 묵고 있다는 여관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
임방울 선생은 소년에게 소리 한번 해보라고 권했고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춘향가 대목 중 ‘쑥대머리’를 불렀다. 그러자 임방울 선생은 “목구성이 참 좋구나, 소리를 하면 장차 큰 소리꾼이 되겠다”며 제자로 삼겠다고 했다.
임방울 단원에 합류한 그는 단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당연히 궂은일은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천성이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했기에 열심히 했고 틈틈이 임방울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8개월 만에 무대에 섰다.
공연은 한 여름과 한 겨울에는 쉬었다. 갈 데가 없었던 청강은 단원으로 있던 선배의 집에서 묵으며 끼니는 임방울 선생 집에서 해결했다. 임방울 선생은 그를 자식처럼 대했다.
청강은 어릴 적부터 기골이 장대해 10대 후반 때부터 씨름 터를 누볐다. 스승을 따라 김제읍에 공연을 갔다가 장터에서 씨름판이 벌어진 것을 보고 뛰어든 것이 우승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공연을 간 곳에 씨름판이 열리면 시합에 뛰어들곤 했다.

정응민 선생에게 적벽가 사사

4년간 임방울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한 그는 18세 되던 해에 <적벽가> 중 ‘삼고초려’를 배우기 위해 보성의 정응민 선생을 찾아간다. 임방울 선생도 열심히 배우고 오라고 응원을 했다.
적벽가는 판소리 가운데서 목청이 당당하고 호령을 하듯 소리를 하는 데다 부침새를 잘 구사해야 하기에 임금이나 사대부들이 특히 좋아했다. 명창들도 신분상승을 위해 반드시 적벽가를 불렀고 명창이란 소리를 들으려면 적벽가를 완벽하게 구사해야만 했다.
정응민 선생은 흔쾌히 그를 받아줬다. 이때 청강은 보성읍에 살던 소리꾼 박춘선을 만난다. 박춘선 누님은 8개월간이나 수업료에 쓰라며 다달이 쌀 두 말씩을 보내줬다.
8개월간 정응민 선생에게 삼고초려를 배운 그는 임방울 선생에게 돌아온 후 적벽가와 수궁가, 춘향가의 독공을 위해 대흥사로 들어간다. 독공은 판소리꾼들이 득음을 위해 토굴이나 폭포 밑에서 하는 발성훈련이다. 그는 강진의 고승사와 만덕사 등을 찾아 득음공부를 이어간다.
그는 1947년 남원에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출전해 스승에게 배운 적벽가를 불러 장원을 한다. 명창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나 배고픈 삶은 여전했다.

공연단 조직해 단장 맡아

이후 그는 고모 댁이 있는 해남에 머물며 제자양성을 하는 한편 공연단을 조직한다. 여기저기서 소리꾼들이 모여 들여 20명으로 단원을 꾸릴 수 있었고 20대 초반인 그가 단장을 맡아 해남과 목포, 진도 등으로 공연을 다녔다.
특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엔 여기저기에서 축제가 많이 열렸고 청강의 공연단을 찾는 수요도 늘어났다. 춘향전과 심청전, 흥부전 마당극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당시 공연단의 이동수단은 소달구지였다. 여자단원들은 달구지에 타고 남자단원들은 걸어서 이동했다. 이 무렵 청강은 공연단의 멤버였던 조애랑을 알게 된다. 조애랑은 전국고전미인선발대회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는데 둘은 연인으로 발전해 아들 병국을 낳았다.
이 무렵 청강은 해남에 집을 마련하게 된다.
청강은 어느 날 임방울 선생이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청강은 그동안 운영하던 공연단을 정리하고 아내 조애랑과 아들 병국을 고모 집에 남겨둔 채 스승을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임방울 선생의 지정고수로 활동하던 김재선 선생으로부터 고법을 배우게 된다. 나중에 그가 고법예능보유자가 되는 기틀이 이때 마련된 것이다.

북가락에서도 타고난 재능

청강은 북을 정말로 잘 쳤다. 청강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임상래 씨는 논문에서 정철호 선생의 북장단은 창과 악을 두루 알고 치기에 다른 누구의 북장단과 달리 섬세하고 완벽하다고 적고 있다.
김은정 씨는「한국의 장인」이라는 책에서 “정철호의 고법은 누구나 소리하기 쉽고 자상하고 편한 편이어서 청중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고법이다. 단순히 장단만 맞추는 북이 아니라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고 또 소리꾼의 빗나감도 감히 지적할 수 있는 고수이다”고 썼다.
광주 MBC 얼씨구 학당을 진행한 명창 유재관은 청강의 고법은 부지깽이도 일어나 춤추게 하는 북장단이라고 극찬했고, 성창순 명창은 청강과 함께 한 무대에서 득음이 주는 경지를 맛보았다고 밝힌 바 있다.
고수와 창자의 호흡이 얼마나 잘 맞느냐에 따라 공연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청강의 북 치는 솜씨에 당대의 명창들이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쟁산조를 창시하다

당시만 해도 아쟁산조는 미개척분야였다. 청강은 국립국악원에서 아쟁이란 악기를 접하게 된다. 이때 청강은 민속음악에 어울리는 아쟁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쟁이란 악기를 구할 수 없어 대흥사로 내려와 12줄의 가야금으로 무려 200일간의 연구 끝에 8줄로 짠 악기를 만든다. 어린시절 들었던 무가를 떠올리며 특유의 아쟁산조 소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청강은 악기공장을 하는 김봉기를 찾아가 일곱 줄의 아쟁 줄을 여덟 줄의 아쟁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아쟁산조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정철호의 아쟁이다.
정철호의 아쟁산소는 슬프고 애절하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한과 서러움을 아쟁가락에 얹어놓은 듯한 소리이다.
이후 아쟁산조는 여성국극에 도입돼 새로운 공연무대를 탄생시킨다.
그의 아쟁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아쟁산조를 배우겠다는 제자들도 많았다. 또 아쟁산조는 우리민속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악기로 자리 잡았고 현재 대학교 국악과 전공과목으로 지정돼 많은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청강이 아쟁산조로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 서울 명륜동에는 낙산장이라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전주우석대학 설립자인 김종익이 주인이었고 그는 국악인들을 후원했다. 그의 부인도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 이사장으로 국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 부인은 청강의 아쟁산조를 전해 듣고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부인은 청강의 판소리와 아쟁산조를 들은 후 진정한 소리꾼을 만났다며 청강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리고 청강에게 집 한 채를 내준다.
서울에 집이 생기자 그는 시골로 내려가 가솔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고 시골집은 고모에게 내준다.

국악작곡가로 명성 떨쳐

해방 이후 여성국극은 상당한 인기를 누렸는데 국극은 소리와 춤, 노래와 연기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특히 임춘행이 여성국극단체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국극이 인기를 끌자 여기저기서 단체들이 조직됐고 청강은 여성국극의 작창(作唱)과 작곡을 도맡다시피 했다. 한 달이면 10개 정도의 작품의뢰가 그를 기다렸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청강이 작곡한 곡은 2만여 개에 이른다. 20년 동안 여성국극의 99%는 그가 작곡한 작품이었다.
이때 작곡한 곡이「호동왕자와 낙랑공주」,「삼천궁녀」,「선화공주」,「마의태자」,「아사달과 아사녀」등이다. 이중「호동과 낙랑공주」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해 전국적으로 히트를 쳤고 일본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청강이 작곡에 손을 댄 것은 25세 때부터다. 작곡은 소리와 달리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있어야 했다. 특히 해방 후 민중들에게 있어 그의 작창과 작곡은 해방감을 안겨주는 분출구였다. 여성국극 쇠퇴 이후에도 그의 작곡 열정은 식지 않았다.
반재식 씨는「여성국극왕자 임춘행전기」라는 책에서 정철호와 임춘행의 만남을 역사적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은 여성국극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곡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 곡들은 여성국극만이 표출해낼 수 있는 감정과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여성국극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청강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다. 이에 청강은 열사가와 남남북녀, 백범 김구, 훈민정음 등의 곡을 만들었다.
열사가에는 이순신과 권율장군, 녹두장군 전봉준,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등의 업적을 담았다.

김대중 ‘옥중단시’ 판소리로 제작

그는 김대중의 <옥중단시>도 판소리로 제작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의 총재시절  출판기념회와 각종 행사 때 청강을 반드시 초청했다.
청강은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높았다. 5·18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그날이여 영원하라>를 음반으로 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싶어 망월동 묘비명에 적인 글귀를 메모해 만든 작품이다.
청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장흥전통 가무악 전국제전’을 만든다. 이희호 여사에게 국악을 대중화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생긴 제전이며 최고상은 대통령상이다.
청강은 2000년에 목포예술회관에서 창무악 ‘해상왕 장보고’를 무대에 올렸다. 목포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아 세종문화회관의 앵콜공연으로 이어졌다. 이때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영부인이 관람했고 노 대통령은 로비에서 출연진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했다.
청강은 2008년 국악계의 노벨상이라는 방일영 국악상을 수상한다.
청강은 신재호 동리국악상, 세종문화상 대통령상, 보관문화훈장 등 굵직한 상을 받았지만 방일영 국악상을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 국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청강의 꿈은 판소리고법 제5호 전수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전수관에 판소리와 고법, 기악, 무용, 사물 등을 전승하고 싶고 임방울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임방울 유파를 잇는 것이다.
임방울 선생은 그 명성에 비해 아직까지 전수자가 정해져 있지 않고 있다. 이에 청강은 임방울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그의 유파를 계승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예의이자 우리 국악의 전승발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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