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무형유산을 찾는 대장정     서초희(해남오구굿 계승자)

▲ 강신무 출신인 서초희씨는 세습무들이 잇는 해남 오구굿을 28년째 잇고 있다.

오구굿 잇기위해 녹음테이프만 60개, 비디오 30개
강신무 출신이지만 해남세습무 굿 형식 원형 계승

 

서초희(62), 그녀는 신 내림굿을 받은 강신무이다. 무속의 세계를 흔히 두 갈래로 나눈다. 몸에 신이 내린 이들을 강신무 즉 무당이라고 일컫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세습무를 우리지역 말로 당골이라 칭한다.
서초희 씨는 강신무 출신이다. 강신무인 그녀가 해남의 각종 축제에 등장해 굿판을 이끄는 것은 세습무들이 이어온 해남오구굿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초희 씨는 강신무이면서도 세습무이다. 강신무 출신이 세습무의 굿판을 이끈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세습무의 굿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굿을 순서대로 풀어내는 굿 행위인 제의식이 중요하다.
그러나 강신무는 굿 도중 신이 몸에 실려 길흉을 맞추는 행위, 즉 특정 제의식 보단 무당의 영험함에 의존하는 굿이다.
따라서 강신무들은 굿 도중 언제 신이 내릴지, 또 신이 내리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신의 음성으로 굿판을 이끌기에 굿의 순서를 중시하는 세습무의 굿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깃든 신을 이겨야 만이 세습무의 굿 순서를 제대로 진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송지면 산정 출신

송지면 산정 출신인 서초희 씨의 조상 중엔 무속인이 없다. 무속인 집안에서 주로 무속인이 나오는 경우와는 다르다. 서 씨는 7세 때부터 몸이 매우 아팠다고 한다. 12살에도 몸이 너무 아파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16세 때에도 몹시 아팠다고 한다.
서 씨의 외할머니는 불심이 깊은 불자였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외손녀가 아플 때마다 정성껏 불공을 드렸는데 무속인들은 신병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20세 때 결혼을 했다. 시댁은 광산김씨로 양반자손이라는 긍지가 높았고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다.
특히 남편은 교회 전도사였고 결혼 후 그녀도 남편을 따라 교회를 다녔다. 그런데 결혼 3년째가 되자 몸에 이상이 오고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을 치러 간 곳마다 신 내림굿을 받으라고 했다. 따라서 그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제정신이 아닌 생활을 15년이나 이어갔다. 남편이 해외까지 나가 벌어들인 돈을 죄다 화투판과 춤판에 쏟아붓는 등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반복했고 그 와중에도 몸은 춥고 이유 없이 무섬증이 드는 등의 증상을 앓았다. 신기였다. 이에 그녀는 신을 떼어 내려는 굿을 숱하게 하며 굿으로 재산을 또 탕진했다.

원진댁에게 신내림굿 받아

주변에선 신병은 낫기 힘들다며 신 내림굿을 받으라고 권했다. 무속인들도 신기가 너무 강해 내림굿을 받아야 만이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는 너무도 컸다. 남편은 무당하고 살 수 없다고 했고 시댁식구들도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자녀들도 부끄럽다며 한사코 무속인의 길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그녀는 해남의 유명한 당골이던 원진댁인 김춘심 씨에게 내림굿을 청했다. 그녀가 한사코 거부했던 신 내림굿을 받겠다고 결정한 것은 자신이 신을 받지 않으면 큰아들에게 신이 내린다는 무속인의 말 때문이었다.
그녀의 내림굿은 씻김굿 종류인 해남오구굿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아침 일찍 시작한 굿이 밤 11시가 넘어서도 그녀의 몸에 신이 실리지 않았다. 참다못한 남편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굿상을 엎어버렸고 그 순간 몸에 신이 실렸다.

친정아버지 신 받아

그녀가 받은 신은 친정아버지와 결혼 15일 만에 황산 연호리 배 전복 사건으로 죽은 사촌시숙, 6살 때 죽은 동생이었다. 내림굿 도중 아버지는 원진댁의 입을 빌려 “부모 노릇 못했으니 너의 명성을 떨치게 해주겠다”고 했다. 굿을 마친 원진댁은 “너는 법당을 안 차려도 대보살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림굿을 받은 후 점을 치는 무속인의 길을 걸었다. 가정은 매일 불화였다, 남편은 점쟁이와 살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했고 부모의 불화를 매일 지켜봐야 했던 큰아들은 19살 때 그만 제초제를 먹어버렸다. 그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신에게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5·18 때 죽은 조카의 환영이 보였다.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에 아들 옷 중 새 옷과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려 조카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그 후 아들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이 완쾌되기까지 남편은 42일간 녹두를 갈아 아들에게 먹였고 그녀도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매일 빌었다.
아들이 일어서자 남편은 조상을 잘 받들라며 무속인의 삶을 허용했고 그녀는 집안에 법당을 차렸다.

강신무지만 굿은 세습무 굿

법당을 차린 후 많은 굿이 들어왔다. 그녀는 굿 의뢰가 들어올 때면 항상 세습무인 안애임 씨와 원진댁을 대동했다. 씻김굿의 한 종류인 해남오구굿의 제의식을 결합한 굿을 행한 것이다. 해남오구굿을 하려면 피리, 장구, 징, 대금, 아쟁과 보살이 동원되는 큰 굿판이 형성된다. 이에 비해 법사굿은 법문을 중심으로 하기에 인원도 적고 제형식도 간단하다. 그러나 그녀는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위해선 제대로 된 굿을 해줘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12걸이인 복잡하고 긴 시간이 요구되는 오구굿을 고집한 것이다.
해남오구굿은 해남 세습무들이 이어온 해남의 전통 제의식이다. 이러한 굿판을 만들기 위해 모든 굿판은 반드시 세습무들을 대동한 것이다. 따라서 서초희 씨가 진행하는 굿판은 해남오구굿에 자신의 몸에 실린 신을 통해 죽은 자 또는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강신굿이 결합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28년 동안 해남오구굿으로 굿판을 이끌었던 서초희 씨는 소리를 곧잘 하는 무당이다. 소리에 관심이 많았기에 구음으로 하는 해남오구굿 사설에도 관심이 컸다. 따라서 세습무들과 굿을 함께 하면서 해남오구굿의 진행순서와 사설을 모두 배우게 된다. 물론 세습무들이 12걸이 해남오구굿을 제대로 전수해주지는 않았다. 이에 그녀는 남편과 함께 1992년부터 안애임씨와 원진댁과 함께 한 모든 굿을 일일이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해남오구굿을 집약한 사설집을 만들었다.

최초 해남오구굿 책자로 엮어

그리고 남편과 함께 녹취록과 동영상을 통해 삼산 원진댁인 김춘심 씨의 해남오구굿 창본에 이어 2000년에 안애임 씨의 오구굿 사설을 담은 ‘해남오구굿 무가 안애임 창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원진댁의 사설과 안애임 씨의 사설을 집약해 ‘해남오구굿 무가 서초희 창본’까지 완성했다. 그간 세습무들을 통해 구전으로 내려온 해남오구굿 12걸이를 처음으로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그녀는 처음엔 원진댁과 안애임 씨와 함께 굿을 하며 귀동냥으로 오구굿을 배워왔다. 그러나 입으로만 전수되는 사설을 창본 없이 익히기란 쉽지 않았다. 서 씨는 1992년도부터 남편이 녹음한 테이프를 따라 익혔고, 1993년부터는 비디오를 녹화해 부족한 몸짓을 익혔다. 사설을 녹음한 테이프만 60개, 춤사위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만 30개다.
특히 2000년부터 해남에 마지막 남은 세습무 안애임 씨가 작고하면 해남오구굿의 맥이 끊어질까 우려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사설집을 만들었고 녹취록을 글로 옮기는데 1년이 걸렸다.
그리고 녹음테이프를 숱하게 반복해 들으며 정확한 사설을 익혔다. 그 와중에 원진댁 사설과 안애임 씨의 사설의 차이를 발견했다.
안애임 씨 사설은 유식한 한문풀이가 많이 들어있는 대신 원진댁 사설은 전라도 사투리가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세습무들은 집안 대대로 구전으로만 굿을 이어받았기에 사설 내용과 말투가 다르게 전해온 것이다.
특히 해남오구굿은 웅얼웅얼 구음으로 굿판을 이어가기에 빠른 장단인 휘모리와 중중모리장단 부분은 일단 알아듣기 힘들다. 이 부분은 숱하게 반복해 들으면서 내용을 완전히 익혔다. 그리고 2011년 안애임 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해남오구굿 전 과정을 재현해 보였고 이에 안애임 씨는 제대로 익혔다고 말해줬다.

매년 군민광장서 오구굿 재현

해남오구굿의 원형을 그대로 잇고 있는 서초희 씨는 2011년부터 군민광장에서 해남오구굿을 군민들 앞에서 재현하고 있다.
매년 재현되는 오구굿을 보기 위해 400여 명에 이르는 군민들이 군민광장을 찾고 있다.
오구굿 재현에는 아쟁,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태평소, 장고, 징, 꽹과리 등이 총동원된다.
태평소의 가늘고 높은음과 대금의 구성진 소리 등은 한 많은 망자의 영혼을 울리고 달랜다. 이때 서 씨는 몸에 접신된 영혼의 절규를 토해 내고 토해내는 망자의 슬픈 사연에 관객은 눈물로 지켜본다. 또 걸쭉한 입담에선 관객은 박장대소로 답한다.
인간의 설움을 절정까지 이끈 후 해학으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치유하는 해남오구굿은 우리의 전통악기가 총동원되는 종합예술이다.
서 씨는 매년 명량대첩축제 본 무대에서 오구굿을 재현해 보이고 있는데 서 씨는 어떤 무대이든 공연을 위해 굿의 원형을 변형시키지 않는다. 타 씻김굿과 달리 원형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따라서 그녀의 오구굿 재현은 공연 도중 관객들이 무대에 올라 지전을 놓는 등 일상에서 이뤄지는 굿 모양을 띤다.

28년째 우슬재서 길굿

서 씨는 28년째 우슬재 정상에서 해남군민의 안녕을 위한 길굿을 열고 있다.
매년 사비를 들여 우슬재 길굿을 열고 있는데 한번 굿을 마련할 때마다 소 한 마리와 돼지 2마리 등 1500여만 원에 이르는 돈이 지출된다. 우술재 굿이 열리는 날엔 며칠간 음식을 장만하고 다른 굿은 삼가는 등 몸가짐을 특별히 한다.
서 씨가 우슬재 길굿을 열게 된 것은 이곳에서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이다.
해남터널이 뚫리기 전 우슬재는 해남읍을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고개가 가파르고 곡선이 많아 교통사고가 잦았다. 이에 서 씨는 해남군민의 안녕과 우슬재를 통과하는 모든 차량의 안전을 위해 길굿을 시작했다. 길굿도 해남전통 세습무인 오구굿으로 진행한다. 또 옥천 만의총 추모대제에도 오구굿으로 망자들을 천도하고 스승인 안애임 씨를 위한 오구굿도 매년 마련하고 있다.
여기에 우슬재 초입 자신의 신당(神堂)인 봉유암을 찾은 신도들의 굿도 해남오구굿으로 진행한다.
한편 씻김굿은 진도 굿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해남에선 해남오구굿으로 통한다. 망자를 천도한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해남오구굿은 진도 씻김굿과 달리 원형 그대로가 보존돼 있고 해남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해남오구굿은 11줄인 진도 씻김굿과 달리 12줄로 구성돼 있다. 전국 어느 굿에서도 볼 수 없는 명줄당기기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시켜주는 명줄당기기는 해남지역 굿만이 가진 특징이자 해남오구굿의 하이라이트다. 힘이 넘치고 똑똑 끊어지는 사설도 해남굿의 특징이다.
이러한 오구굿은 세습무(당골)들에 의해 전수돼 왔다.
따라서 해남오구굿은 무당의 몸짓이 아닌 사설로 굿을 이끄는 소리굿 형식이다.
이러한 해남오구굿을 강신무인 서초희 씨가 잇고 있는 것이다.
서 씨는 해남오구굿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해남오구굿 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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