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무형유산을 찾는 대장정 ㉔김육남(황산 옥공예 계승자)

50여년째 황산 옥공예 명맥 이어온 장인

공예품대전 20년째 입선, 2회 국무총리 상

▲ 김육남씨는 50년째 황산 옥공예를 잇고 있는 옥공예 장인이다.

1도1각의 명인, 한 번의 손놀림으로 옥에 용을 조각해 내는 기술은 전국에서 그 혼자뿐이다. 옥에 밑그림을 그린 후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밑그림도 없이 머리로 구상한 용 그림을 조각칼을 이용해 한 번의 손놀림으로 새기는 기술, 그것도 복잡하고 율동적인 용의 그림을 1도1각으로 조각하는 기술은 장인이 아니면 하기 힘든 작업니다.

김육남(63) 씨, 황산면 옥연에서 지금껏 해남옥공예의 명맥을 잇고 있는 이다. 그는 1도1각의 명인답게 2007년에 (사)대한명인회로부터 명인 지정을 받았고 대한민국공예품대전에서 20년째 입선과 2회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한국관광공사로부터 명품인증서를 받은바 있는 그는 한마디로 옥공예를 예술로 끌어들인 이다. 각종 동물문양과 생활용품을 조각하는데 이어 1도1각의 용 그림을 새김으로서 옥공예를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50년째 옥공예를 잇고 있는 그는 황산 옥동에서 유일하게 전업 옥공예 작가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한 집에 10여 명의 일꾼이 일했을 만큼 황산 옥동마을은 수백 명의 옥공예 종사자들이 일을 했다. 그러나 옥공예가 사양 산업이 되자 지금은 5명만 옥공예에 종사하고 있다. 이중 김 씨만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 씨는 옥공예에 종사해 오면서 숱한 작품을 만들었다. 호랑이, 두꺼비, 향로 등 옥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손길로 거쳐 작품으로 태어났다. 예전에는 선물용으로 옥공예를 사갔다면 요즘은 소장품으로 옥공례를 사가고 주문제작도 많이 들어온다.

 

9살 때 도토리에 도장 새겨

 

김육남 씨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는데 9살 때 이르러 그 재능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새길 수 있는 물건만 보이면 새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다닐 때인 9세 때부터 도토리에 도장을 새겼다.

도토리 도장은 지금의 도장기술이 발달하기 전 도토리를 삶고 말려서 시눗대를 이용해 손잡이 부분을 만들고 도토리의 끝부분에 글자를 새겨 넣은 도장이다. 김 씨는 이때부터 동네 어르신들의 도장을 만들었다.

그런 그의 손재주를 남달리 봤던 이가 있었다. 당시 해남에서 시집을 온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자신의 고향에 가면 옥매산이 있는데 거기에서 옥이 나온다고 말을 해줬다. 이때 초등학교 3학년, 그의 나이 10살 때이다. 그는 30리 길을 걸어 버스를 타고 해남 황산면 옥매산을 찾아왔다. 물어물어 해남에 도착하니 새벽 1시30분이었다. 강진에서 해남 황산면 옥매광산까지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그는 산에 흩어져 있는 옥을 몇 개 주워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일깨운 1도1각 예술

 

해남 옥과의 인연으로 그는 19살 때 해남 황산면 옥동으로 오게 된다. 서당 훈장이었던 아버지는 반대했다. 어쩔 수 없이 어느 날 새벽 아버지 몰래 집을 나왔다. 이후 아버지는 몰래 집을 나왔다. 이후 아버지는 몇 번이나 해남으로 찾아와 집에 가서 농사를 짓자고 회유했다.

아버지는 옥공예 삶을 반대했지만 그에게 물려준 것도 많았다. 그는 아버지가 서당 훈장이었던 관례로 어려서부터 한문을 많이 배웠다.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배웠던 그는 아버지의 솜씨도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짚풀공예의 달인이었다.

그는 황산면 옥동으로 온 후 5년 동안 견습생으로 일을 했다. 그러나 스승은 없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용 문양을 새기려면 10년 정도 배워야 하는데 그는 처음부터 용을 새겼다.

그리고 1975년 화신공예라는 자신의 공장을 설립했는데 이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그는 12지 동물에서 사군자 등 새기지 못하는 문양이 없을 정도로 솜씨가 뛰어났기에 하루 2~3시간만 자고 일을 해야 했을 정도로 주문이 밀려싿. 특히 김 씨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옥공예품을 밑그림 없이 1도1각의 기법으로 순식간에 작업을 마치는 것으로 유명해 더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때 옥공예 생산

 

황산면 옥동리에 옥공예공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이다.

이곳에ㅅ는 도로변 양편에 20여개가 넘은 옥공예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한 공장마다 10여명이 넘은 인력들을 고용해 옥공예를 생산했다. 전국에서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옥동으로 몰려들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옥공예는 일본과 미국으로 수출됐다. 사람이 북적거린 거리, 동네 아이들도 옥공예 기술을 배웠다. 황산 옥석공예는 화려하지 않지만 빨강, 노랑, 검정의 다채로운 색깔을 띠고 있고 손으로 깎고 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옥이 물러 섬세한 조각품이 가능했다. 제작자들은 장수와 복을 준다는 동물상과 보석함, 체스 등을 제작했고 이 제품은 외국인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60년대 말 서울 조선반도 아케이트 전시품 중 최고 인기를 끌었던 것이 황산 옥공예다. 옥동마을에 옥공예공장이 형성됐던 것은 인근에 옥이 나오는 옥매광산과 성산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산광산과 옥매광산은 일제강점기 때 군수물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주로 비행기 엔진에 이용되는 내화 성분인 돌을 채취, 배로 황산 입암포에서 일본 나고야 비행기 제조 공장으로 운반됐다.

 

한국 대표적인 옥공예 생산지

 

그런데 이곳에서 명반석뿐 아니라 옥공예도 많이 생산되자 일본인이 인력을 고용해 옥공예를 만들기 시작했다. 옥공예공장은 처음 우수영에 위치했다고 하나 1940년대에 지금의 황산 옥동마을로 옮겨왔다고 한다. 옥공예 제품이 인기를 끌자 옥동마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옥공예 생산지가 됐다. 그러나 90년대 초 값이 싸고 색이 화려한 옥이 수입되면서 급격이 사양의 길을 걷게 됐다. 옥공예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옥공계 기술자들도 옥동을 떠났고 2000년대에는 1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2010년대 진도방면으로 4차선 길이 새로 생기자 지금은 5명만이 옥공예에 종사하고 있다. 해남군이 황산옥공예를 살리기 위해 1997년에 옥동마을 길가에 전시판매장을 건립했던 노력도 진도 간 4차선 도로로 인해 물거품이 됐다. 다행이 옥동마을에는 김육남 씨가 1도1각이란 예술을 개발해 전통 옥공예기술에 결합, 옥동의 부흥에 힘을 쏟고 있다.

 

너무도 정교해 심사에서 탈락

 

김육남 씨의 작업실에는 지금까지 출품한 작품을 한데 모은 전시공간이 있는데 작품 중 가슴 아프면서도 뿌듯한 작품 하나가 있다.

그는 초장기 때 멋모르고 출품했다 본선에도 못 오르고 낙선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출품작 중 흑백의 옥에 용을 새긴 연적이 있는데 심사위원들이 사람 손이 아닌 레이저를 이용했다고 지레 짐작해 낙선시킨 작품이다. 그 후로는 억지로 더 투박하게 작업해 그런 오해를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올해 ‘제46회 대한민국공예품대2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20년 연속 공예대전 입상이자 국무총리상만 2회 째다. 김 씨는 20년 연속 대한민국공예품대전에 입상하면서 꾸준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후계자 양성이 꿈

 

김 씨는 손으로 직접 새긴 도장은 애착이 크고 한글보다 한문 도장이 예술성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원모양의 도장보단 사각형 도장이 우리의 전통적 도장이라 사각형 도장을, 이름은 음각으로, 호는 양각으로 새길 것을 권한다. 그는 원래 우리의 전통적인 도장의 형태는 사각인데 일제강점기 때 원형도장이 사용됐다고 한다. 원은 일본을 상징하는 도형인데도 해방이후 지금까지 원형도장을 사용하고 있다며 화가들이 낙관을 사각으로 하는 것을 보더라도 전통적인 도장 형태는 사각이라고 말한다.

사양산업으로 접어든 옥공예, 그런데도 그가 조각칼을 놓지 않은 것은 그의 낙관적인 성격과 부지런한 천성 때문이다. 또 그는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냥 옥이 좋아서 시작한 길. 김 씨는 해남옥의 우수성과 작품성을 아는 고객들이 있는 한 작품 활동을 계속 할 것이라고 한다. 해남의 특산품 1호인 옥공예 전통을 지키고 있는 그의 꿈은 후계자 양성이다. 50년간 종사해온 일인데다 예술로써의 옥공예의 가능성이 있기에 자신의 기술을 이을 후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그에겐 있다.

따라서 그는 토요명량체험마당에서 작은 체험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체험을 통해 재능이 있는 후계자를 발굴하기 위해서란다.

한편 김육남 씨는 2015년 옥공예분야 해남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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