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 경(전 영암부군수)

나는 사계절 중 유난히 가을을 좋아한다. 쓸쓸함과 허전함에서 느끼는 고독감 때문이다.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른 감정이다. 외로움에 술이 생각나지만 고독하면 인생을 생각한다.

시인이요 소설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헷세는 이렇게 노래했다.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이 몸의 불가사의여! 삶은 곧 고독이다. 제 아무도 남은 알 길이 없고 누구나 모두 모두가 홀로이어라.”

유년 시절에도 가을을 좋아했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해방 전후 세대로 태어난 나는 의식주가 여의치 못했다. 그렇지만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곡식과 여러 가지 과일 등 먹거리가 풍성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마당 한 가운데는 볏단이 둥그렇게 작은 산처럼 자리를 잡았다. 또 대청마루며 심지어 안방구석까지도 콩, 깨, 고추며 감, 대추, 고구마 등 간식거리가 풍부해 먹는 재미에 빠져 형이상학보다는 형이하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러나 가을의 끝자락에서 주변이 깨끗이 정리되면 세상은 온통 쓸쓸함과 허전함에 휩싸였다. 허수아비만 홀로 남은 황량한 들판이며 무성했던 잎은 모두 지고, 찬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앙상한 감나무의 나목을 바라보노라면 나는 어느 순간 철학자가 되었다.

더구나 어쩌다 한밤중에 헛간의 화장실에 다녀오다 문득 고개극 들고 청명한 하늘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을 쳐다보다 생의 심연에 빠져들기 몇 번이던가.

그럴 때면 나는 어김없이 호롱불을 다시 켜고 국어교과서의 「페이터의 산문」을 읽고 또 읽었다.

“참다운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인구에 회자되는 호머의 시구하나로도 이 세상의 비애와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마웃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마한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원수도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뜯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길 자나 모두가 다 한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사람들은 흔히 행복, 성공, 사랑을 삶의 최고 가치나 덕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모두 무너지고 마는 한낱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특히 2016년 가을과 함께 시작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게이트”의 진신을 무엇이며, 종착지는 어디일까?

속절없이 무너지는 욕망과 권력 앞에서 삶은 영원하지도 불공평하지도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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