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무형유산을 찾는 대장정 박판수(해남무형자산 제1호 대장장이)

▲ 아버지에 이어 2대 째 대장장이 삶을 살고 있는 박판수씨가 맡아 운영하는 명량대장간은 관광객들 내에서 인기가 높다.

우수영장·명량대첩지서 대장간 운영
단단하고 가벼워 지금도 단골들 찾아

 

박판수(63) 씨는 지금도 직접 손으로 호미와 낫 등을 제작한다. 농기구 시장도 이미 기성제품들이 장악한 상태지만 그는 지금도 모든 농기구를 손으로 만드는 것을 고집한다. 호미와 낫 등의 손잡이도 간벌한 산에서 주워온 소나무로 만든다.
문내면 신흥리 출신인 박판수 씨는 아버지에 이어 대장간을 운영하는 대장장이이다.
아버지 박주남 씨는 문내면 일대에서 알아주는 대장장이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황산면 옥매광산의 대장간에서 일을 했다. 솜씨가 좋아 광산채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고 집에도 대장간을 차려 운영했다.
대장간 운영으로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른 아침부터 대장간을 찾아온 사람들은 숫돌에 낫과 칼을 갈거나 숯에 불을 붙이고, 풍구에 바람을 넣은 등 모두가 분주했다. 지금은 대장간 주인이 이 모든 일을 하지만 당시는 달랐다고 한다. 대장장이는 담금질과 하마로 쇠를 두드리는 일을 주로 한 반면 숫돌에 낫과 칼을 가는 일과 풍구에 바람을 넣는 일은 손님들이 했다고 한다. 당시는 손으로 하는 수작업이고 기계도 발달되지 않아 농기구를 새로 구입하거나 수선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종일 대장간에서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 때 옥산대장간 운영

아버지가 운영하는 대장간은 옥산대장간이었다. 옥매광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기술을 보증하기 위해 이곳에서 만든 모든 농기구에 옥산대장간이라 적힌 도장을 찍었다. 일이 많이 밀릴 때는 옥매광산 대장간에서 일했던 광부들을 불러 하마로 쇠를 두들기는 일을 맡겼다. 이때의 농기구 값은 쌀과 보리였다. 그것도 가을 수확 이후에 가져다주는 식이었기에  대부분 외상거래였다.
독자인 아버지는 9남매를 뒀다. 모두 손재주가 뛰어났지만 그중 아버지의 손재주를 가장 많이 닮은 이가 박판수 씨였다. 큰 형님은 어릴 적 아버지의 일을 도왔지만 그는 대장간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됐다. 부모님은 위험한 기계에 다칠까 봐 우려해 그를 기계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20세 때부터 대장장이 길

어느 날 어머님은 아들 다섯을 불러놓고 호미를 직접 만들어 보라고 했다. 형제들이 완성한 농기를 본 어머니는 박판수 씨의 호미가 제일 잘 만들어졌다며 대장간 일을 허용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20세, 대장간에서 본격적인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 때 제주도로 건너가 철공소 직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7년 반 동안 아들 둘을 낳고 군 복무까지 마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본격적인 대장장이 길을 걷게 된다. 타고난 기술에 제주도 철공소에 익힌 기술이 더해졌기에 농기구 제작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옥산대장간 운영과 함께 황산과 우수영, 화원장을 돌며 대장장이 일을 했다. 당시만 해도 오일장에는 3~4명의 대장장이들이 있었다. 대장장이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은 대충 거적을 쳐서 만든 공간이었다.
그의 기술은 금방 소문이 나 찾아가는 오일장마다 단골이 늘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해질녘까지 담금질을 해도 밀려드는 일감을 소화할 수가 없었다. 밀린 일감은 집으로 가져와 제작하고 다음 장날에 가져다주는 식으로 일을 소화했다.  
특히 제주도에서 일감이 밀려왔다. 제주도에선 주로 호미와 낫, 해녀들이 쓰는 도구들이 인기가 많았는데 그는 많은 양을 만들어 제주도로 보내곤 했다. 그가 만든 제품은 가격이 더 저렴하고 품질도 좋았기에 제주도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는 같은 호미여도 지역마다 모양새가 다르다고 말한다. 해남의 경우 황토 땅이라 비가 온 후 땅이 굳어 호미의 날이 날카로운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또 사람들마다 자신이 익숙해 하는 농기구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자신이 사용했던 농기구 모양대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문에 응답했다. 맞춤형 농기구인 셈이다. 박 씨는 호미도 자신에게 맞은 것을 써야 팔 움직임이 가볍다며 농민들도 평소 손에 익은 농기구를 원한다고 말했다.

20년간 장돌뱅이 대장장이
 
맞춤형 농기구에 쇠도 단단해 그의 대장간은 시간이 갈수록 북새통을 이뤘다. 장날 때마다 100여 명에 이른 손님들이 몰려들곤 했다. 일이 밀려있으면 농기구를 미리 주문해 놓거나 수선을 부탁해 놓고 가는 손님들도 많았다.
특히 오일장에서 함께 대장간을 운영하던 이들이 연로해 더 이상 나오지 않자 그는 오일장의 독보적인 대장장이로 자리 잡게 된다. 그는 20여 년 간 장돌뱅이 대장장이 생활을 했다.
그는 쇠로 된 모든 농기구 제작에는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낫과 호미는 기본이고 망치며, 작두, 괭이도 만들었고 간척지가 되기 전에는 조쇠도 많이 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농기구를 사거나 수리하러 온 사람들은 숯을 직접 가져왔다고 한다. 숯을 가져오면 농기구 값이 더 싸기에 90% 이상은 집에서 직접 만든 숯을 대장간으로 가져왔단다. 당시는 대부분 집에서 소 한 마리 정도 키울 때라 소여물을 삶을 때 땔감으로 사용한 장작으로 집안마다 숯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쇠를 달구는 것엔 숯을 사용했다면 불을 지피는 풀무는 전기로 돌리는 후항을 사용했다. 이때는 후항이 대단한 선진기계였다. 다른 대장장이들은 사람 손으로 바람을 넣은 풍구를 이용한 반면 그는 전기인 후항을 사용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호미 하나를 만드는 동안 그는 2~3개의 호미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대규모 농사꾼으로도 유명

그는 밭 5만 평에 간척지 논 40ha 등 대규모 농사를 짓고 있다.
또 충남에 위치한 해미우리미단 협업으로 쌀국수 쌀을 재배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는 가공산업 선구자로 전라남도 농어민 대상과 농식품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규모 농사 때문에 4년 정도 대장장이 일을 쉬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찾는 연로한 농민들이 많은 데다 풍물시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우수영장에 대장간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는 지역민들의 요구에 따라 해남군은 5년 전 장 한 켠에 조립식 건물을 지어 그를 대장장이로 초빙했다. 그는 현재 우수영장이 서는 날이면 대장간의 문을 열고 있다.
우수영장날에는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기성제품들은 날에 힘이 없지만 그가 만든 것은 수제품이라 쇠가 강해 지금도 찾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명량대장간, 관광객들에게 인기

그는 우수영 명량대첩 공원 입구에 있는 명량대장간도 운영한다. 이곳 대장간은 명량체험 기간 주말에 문을 연다. 또 명량대첩축제 때도 문을 여는데 인기가 이만저만 아니다.
자녀들을 동반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대장간 풍경을 보여주며 기념으로 호미 등을 사간다. 관광객들도 쇠를 녹여 직접 수작업으로 만든 호미와 조쇠 등을 기념품으로 구매한다.
명량대장간도 인근에 많이 알려져 문내 화원 황산 진도 농민들도 많이 찾아온다. 농기구를 사거나 수리하러 이곳까지 오는 것이다.
그는 호미와 낫 등 농기구 손잡이에 필요한 나무도 직접 산에서 해온다. 간벌하는 산을 찾아가면 숱하게 널린 것이 소나무라며 소나무 가지를 일일이 잘라 집안 가득 모아둔다.
그는 사양화된 대장간은 돈과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그러나 직접 만든 농기구를 찾는 이들이 있고 이것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이 닿는 데까지 쇠를 두드릴 것이라고 한다.
12년째 마을이장도 맡고 있는 그는 2015년 해남무형자산 제1호 대장장이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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