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수깨끼 그래서 더 흥미롭다 ①화원 도요지

▲ 집단 가마터가 존재했던 화원 사동마을 곳곳에는 초기청자 파편이 즐비하다. 1000여년 전 누가 이곳에 거대한 자기 생산기지를 만들었는지 역사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1000여명 인부 거느린 화원 도요지 누가 운영?
우수한 선박, 군사력, 상술까지 갖춘 인물 찾기

 

누가 이 깊은 산 속에 가마를 만들고 청자를 생산했을까. 가마 개수만 60여 기, 60여 기 가마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청자는 도대체 어디로 공급됐을까.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 전, 신라 말에서 고려 초, 60여 기의 가마를 운영할 정도라면 생산한 자기를 전국으로 유통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수한 선박과 군사력은 필수이다. 특히 화원 도요지가 성황을 이뤘던 시기는 10세기 초, 왕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통일신라 말이다.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고 우후죽순 등장한 지방의 해상세력들 간의 각축전이 벌어졌던 시기, 과연 이 시기에 누가 화원에 거대한 자기 생산기지를 만들었을까.
바다를 얻는 자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절, 중국과 일본을 잇는 서남해안 바다에 먼저 눈을 돌린 이는 통일신라 말 장보고였다. 서남해안 바다를 장악한 장보고는 이를 바탕으로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강력한 군사력과 재력, 권력을 쥐게 된다. 장보고가 장악했던 재해 해상권, 장보고 죽음 이후 서남해안 해상권을 누군가 잇는다. 화원 도요지 정도의 규모를 경영하려면 강력한 해상세력이어야 한다. 누구일까. 장보고를 통해 서남해안 뱃길의 중요성을 알았던 인물, 땔감과 흙, 물자가 풍부한 화원면 사동 일대의 가치와 지리적 이점을 알았던 인물, 뱃길에 능숙하고 자기를 유통시킬 상인의 기질과 강력한 군사를 부릴 줄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    
가마 1기당 20여명의 도공 및 인부가 필요하다. 60여 기라면 1000여명이 넘은 인력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화원 도요지를 운영한 해상세력을 찾아가는 길은 흥미롭다.   
당시 화원지역은 외진 곳이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이었고 육지는 영산강 물줄기를 이용했다. 한마디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화원면 사동리에 분포한 가마터 발굴이 시작된다. 해남군은 올해 8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1~2기의 가마터를 발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마터의 발굴은 화원도요지의 시기와 우리나라 청자역사를 밝히는데 있다. 따라서 화원 가마를 운영한 주체를 알아가는 것은 역사의 퍼즐 맞추기이다. 하나하나의 퍼즐을 통해, 숱한 상상력을 통해 맞춰가야 하는 역사 찾기이다.
장보고 사망 후 서남해안 해상세력으로 능창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장보고의 활동무대가 완도 청해진이었다면 그의 무대는 신안 압해도였다.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에 맞서 서남해안 해상권을 장악했던 능창, 화원 도요지와 관계는 없을까. 그는 이후 왕건이 보낸 첩자에 의해 나주 반남에서 생포돼 궁예에게 죽임을 당한다.    
왕건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무역 상인이었다. 그를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만든 것은 무역이었다. 이때 남해안에선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해 중국 영파~흑산도~서남해 항로인 남방항로를 통해 중국 강남의 오월국 및 후당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화원도요지는 중국 강남과 연결된 해로에 놓여있다. 따라서 견훤도 화원도요지를 주목했을 것이고 그의 경제력을 뒷받침해주는 거점으로 활용하지는 않았을까.
903년 3월 이후 왕건의 남하가 시작된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수차례 남하해 견훤과의 해상전투를 치르고 910년 진도군을 차지하면서 서남해안 해상권을 장악한다.    
왕건의 서남해안 진출은 견훤의 배후에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고 나아가 견훤의 중국 해상로를 봉쇄하려는데 있었다.
이때 왕건도 화원 도요지를 주목한 것은 아닐까. 당시 도자기는 자금줄이었다. 이미 견훤의 수중에 들어간 가마터를 차지하기 위한 것도 왕건의 또 하나의 남하 목적은 아니었을까.
변남주 교수는 화원 도요지를 차지한 왕건이 이후 산이면 금호도 뒷산에 금성산성을 축성해 도요지를 보호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 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는데 이때 영암군이 부상한다. 강진군의 속현이었던 해남지역은 영암군으로 편입되고 황원현은 황원군으로 승격된다. 고려시대 영암군의 성장은 왕건과 인연이 깊었던 도선국사와 왕건의 책사였던 최지몽(907~987)이 영암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또 황원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화원도요지의 가치 때문일 수 있다는 추정이다.
역사의 수수깨끼인 화원도요지. 화원 가마터 발굴이 조명을 받는 것은 우리나라 청자 역사를 풀 열쇠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청자의 출발점은 중부권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화원 도요지 청자파편을 통해 화원이 한국 청자의 시발점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대두됐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는 한국 청자의 시발점을 밝히는데 의미를 갖는다. 대신 화원면 도요지를 운영한 주체는 다앙한 역사 퍼즐을 통해 풀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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