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수깨끼 그래서 더 흥미롭다 ②산이도요지

▲ 고려시대 초, 산이면 지역에서 생산된 철화청자는 제작기법이 뛰어난 청자로 강진 상감청자 이전의 자기문화를 이끌었다.

106기 가마 운영한 인물 누구
거대한 정치세력만이 가능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 해남에선 정치적 격동이 일어났다.  
통일신라 말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화원면 사동 도요지가 10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사라지고 산이면에 화원 도요지보다 더 큰 규모의 도요지가 전면에 등장했다.
화원도요지는 통일신라 말 왕권이 약화된 시기에 나타났다.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토호세력,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한 인물이 화원도요지를 운영하며 서남해안 바다를 통해 전국에 자기를 유통시켰다.
고려가 안정될 무렵인 10세기 말, 60여 기에 이르렀던 화원도요지가 사라지고 산이면에 106기에 이르는 도요지가 조성된다. 화원도요지를 압도하는 규모, 우리나라 자기역사에서 한 곳에 100기가 넘은 가마가 조성된 예는 산이뿐이다. 상감청자로 유명한 강진도 가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총 개수도 십수기 뿐인데, 106기나 되는 가마를 그것도 한곳에 집중 조성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또 왜, 화원도요지를 버리고 산이면에 새로운 도요지를 조성했을까. 더 많은 땔감과 더 좋은 흙이 산이면에 있어서? 아니면 토호세력 간의 극심한 세력다툼이 이 같은 결과를 낳았을까. 
대규모 가마를 운영하기 위해선 가마를 지필 땔감과 도자기의 원료인 좋은 흙이 필수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생산을 독점할 정치집단, 거대한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가 존재해야 한다.
10세기라면 해남은 영암군에 속한 땅이었다. 특히 산이면은 영암군 관할인 죽산현에 속했고 정부에서 파견된 현감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는 정부와 우호적 관계인 토호세력이 이곳을 다스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토호세력 중 누군가 일정금액의 세금을 내고 100여 기 넘은 가마를 운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인물은 누구일까. 당시 주요 교통수단은 배였다. 따라서 전국에 자기를 운반할 수 있는 정치집단은 해양세력이어야 한다. 사회가 안정된 시기라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자기생산을 독점했던 해양세력, 혹 영암출신인 최지몽의 세력은 아니었을까. 최지몽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며 10세기 말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기반에서 성장한 토호세력이 산이면에 대규모 가마를 조성하고 운영하지는 않았을까.
1983년 전북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8000여 점에 이르는 청자가 인양됐다. 같은 해 12월 완도 어두리 해저에서도 3만2000여 점에 이르는 청자가 발굴됐다. 도대체  이토록 엄청난 양의 자기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1983년 산이면 진산리 도요지 발굴이 시작되면서 수수께끼는 풀리기 시작했다. 진산리에서 나온 청자 파편 등이 군산 십이동파도와 완도 어두리 해저유물에서 나온 청자의 제작기법과 제작시기가 같음이 확인됐다. 해저에서 인양된 유물 양으로 보아 산이면에는 거대한 도자기 마을이 존재했던 것이 확인됐다. 또한 산이면에서 생산된 철화청자는 기술과 예술성에서 강진의 상감청자와 버금간다는 것도 알려졌다. 지배계급과 사찰 등에서 주로 사용했을 철화청자, 이것을 생산한 인물은 세력도 대단했지만 미적 감각에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강진의 상감청자가 주도하기 이전에 고려의 자기문화를 이끌었던 인물, 전국의 뛰어난 도공들도 이곳에서 활약했을 것이다. 산이 가마터는 106기 중 진산리에 위치한 1기만 발굴된 상태이다. 나머지 가마터를 발굴하면 산이면 자기의 역사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산이면의 자기 기술이 강진으로 넘어간 사례도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물론 이 거대한 도요지를 운영한 인물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따라서 역사는 여전히 수수께끼며 그래서 무한한 상상력을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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