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섭(해남다인회 회장)

 인류가 처음 차를 마신 역사적 기록은 기원전 141년 중국 한나라 때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이 차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 일대에 심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차가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할 뿐 아니라 명상에 적합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귀족과 승려 중심으로 음다풍속이 성행하다가 고려 때에는 일반 백성들도 다점에서 차를 사 먹을 만큼 기호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숭유억불 정책과 임진왜란으로 차 문화의 맥이 거의 멸절된 상태에 이르렀으나 조선조 후기에 다산과 초의, 추사에 의해 차 문화 중흥 시대를 연다. 이분들의 차를 통한 우정과 차사랑을 아름다운 교유관계로 알아본다.

 강진으로 귀양 온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귀향지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다 보니 몸이 성치 않았고 답답한 현실로 울화가 쌓여 체증을 달고 살았으며 급기야 빈혈과 중풍으로 괴로워 백련사 혜장스님에게 차를 청하는 걸명시(乞茗詩)를 보낸다.
때는 마침 지금처럼 햇차가 나는 시기. “혜장이 나에게 차를 준다고 약속해 놓고도 같은 문도인 석성스님이 먼저 차를 주자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 했다.”며 원망하는 글을 보낸다.
또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 당초 약속대로 차를 내놓아라. 좀 넉넉하게 나눠주어야 설사병에 걸린 이웃의 병을 고치는데 쓸 수 있으니 어서 차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1805년 겨울에는 초여름에 얻은 차가 동이 나자 이번에는 임금님께 올리는 상소문의 형식을 빌려 다시 혜장에게 차를 청하는 그 유명한 걸명소(乞茗蔬)를 보낸다.

 “나그네는 요즘 들어 차 욕심쟁이가 된데다 겸하여 약용에 충당하고 있다네(중략) 아아 윤택할진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듯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맑은 달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 진듯하오.(중략) 용단봉단은 바닥이 낫고 몸에는 병이 있어 애오라지 차를 청하는 바이오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배품주소서”
과연 얼마나 애타게 바랐으면 조선 최고의 석학 다산 선생이 이처럼 절절한 시문을 보냈을까.
추사 김정희 또한 다산 못지 않았다. 동갑내기 초의스님을 끊임없이 회유하고 협박하고 구슬려서 차를 뺏어낸다. 차를 얻기 위해서는 그림과 글씨도 아끼지 않았다.

 추사의 편지다.
“몇번 편지해도 종내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이젠 아예 내가 보기 싫은 게로군. 나보기 싫은 거야 당신 마음이니 어쩔 수 없고 당신이 들여놓은 차 마시는 습관만은 책임지시게. 답장은 받고 싶지도 않고 자네 보고 싶은 맘 조그만큼도 없으니 그저 딴소리 말고 잘 덖은 차나 작년 치까지 쳐서 곱쟁이로 보내게. 지체하거나 어긋나면 마조의 할과 덕산의 몽둥이를 받게 될거네”
초의스님이 인편에 차와 답신을 보낸다.
“어허허, 초의 차에 환장한 사람이구먼, 마치 양귀비에 중독된 사람처럼 분별없이 글을 쓰셨구먼. 천하의 추사도 초의 차가 없으면 맥 못 쓰고 꼬리 꺾이고 마는구먼” 
추사의 대표작 명선(茗禪)도 초의스님에게 차를 받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써준 대작이다. “초의 그대가 손수 만들어 부쳐온 차가 몽정차나 노아차에 못지않다. 이를 써서 보답한다. 백석군비의 필의를 써서 예서로 쓴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걸명시, 걸명소, 걸명서의 시문 속에는 선인들의 차 사랑과 풍류와 해학이 오롯이 살아있음을 보여줘 후학들을 감동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18세기 차를 통해 다선 삼매에 빠져 인문학을 완성한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오는 20일 곡우에는 햇차를 따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차 밭에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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