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건물 중 임금 위패 모신 객사 가장 위용자랑 
수령 집무실 지금의 군청, 기생 거처인 관노청도

▲ <해남읍과 해남읍성> 해남읍성의 동북쪽 성벽과 읍성안의 객사 건물이 생생하게 남아 있고 사진 아래로는 향교로 보이는 건물도 있다. 멀리 고도리에서 완도 방면으로 뻗어나가는 신작로도 한눈에 보인다.

 해남읍은 소위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옥녀탄금형은 어여쁜 여자(옥녀)가 거문고를 타고 있는 형국이다. 해남은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진산인 금강산(481m)이 있다. 이 산을 올라가 보면 해남읍과 멀리 남으로 펼쳐진 해남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해남읍이 마치 자루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산들이 빙 둘러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는 금강산, 동쪽으로는 덕음산, 서쪽으로는 남곽산이 둘러싸고 있고 한가운데 안산에 해당하는 말매봉(호산)이 불쑥 솟아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국 중에서도 한쪽만이 뚫려 다소 허한 곳이 있다. 그곳은 마산면 방면으로 나가는 서쪽으로 이곳으로는 해남천이 해창만으로 흘러나간다. 
이 때문에 서쪽의 허한 곳을 보완해 주기 위해 심은 비보 숲이 지금의 서림공원에 있는 수백년이 된 느티나무 고목들로 이곳에만 심은 것도 부족했던지 다시 밖으로 나가 학동마을 입구에도 수백 년 된 고목들이 그 허한 곳을 가로막기 위해 서 있다. 
이처럼 읍치의 입지조건에는 풍수지리적인 요건이 중요하게 고려됐다. 관아가 자리한 해남읍성도 이러한 지리적 여건들이 고려됐음을 알 수 있다. 해남읍성은 누가 보아도 명당자리의 공간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산인 금강산은 해남읍을 뒤에서 듬직하게 받치고 있으며, 해남읍이 자리하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앞쪽은 넓은 들판이 자리하고 있다. 바닷길이 연결되는 해로는 해창만을 통해 읍치의 바로 앞에까지 이른다. 
읍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산은 외부로부터 쉽게 공격당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배산임수의 물에 해당하는 하천이 약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금강골에서 흘러내리는 해남천은 1년 열두 달 마르지 않고 읍내를 가로지른다. 

관아의 주요 기관들

▲ <해남객사> 관아건물들 중에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해남객사는 일제강점기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

이처럼 좋은 주변 여건 속에 입지하고 있는 해남읍성 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읍성 안에는 한 고을을 다스리기 위한 오늘날 관공서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기관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기관들을 통틀어 관아라고 한다.
해남군청은 지금 해남읍성안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관공서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인근에 있던 경찰서를 비롯 교육청 등 대부분의 관공서들이 외곽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관아 안에는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수령의 정청인 동헌, 국왕의 위패를 모셔 둔 객사, 고을 양반들의 대표자 격인 좌수와 별감이 있는 향청, 아전들의 근무처인 질청, 기생과 노비들의 관노청,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무기를 보관하는 군기청 등이 있었다. 
해남현 고지도를 통해 보면 해남의 심장부인 동헌은 객사와 함께 지금의 군청이 자리한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동헌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동헌과 함께 관아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 객사다. 객사는 전패를 모신 관계로 수령의 집무청인 동헌보다 격이 높다. 그런 만큼 관아시설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동헌이나 질청에 비해 훨씬 장중하고 위엄이 넘치는 위압적인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해남의 객사는 일제강점기 무렵까지 남아있었는데 당시 해남 객사의 위엄 있는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해남의 객사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객사로서의 기능이 사라진 후에는 한때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해남 객사를 담은 몇 장의 사진 속에는 객사 앞에서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의 해남동초등학교가 한때 해남객사에서 아이들을 모집해 공부했다고 하며, 1946년 지금의 해남동초등학교가 정식 개교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하에 대부분의 읍성이 허물어졌는데, 해남객사 역시 이때 사라져 지금은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또한 지방관아의 아전들이 살았던 장방청은 옛 해남교육청 자리(현 지하주차장), 지방관아의 육방의 하나로 형전사무를 맡았던 형방청은 옛 해남교육청 뒤에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죄인들을 가두었던 옥 터는 서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만수정’이라는 활터가 서초등학교 뒤 옥 터 북쪽에 있었으나 현재는 우슬종합체육시설이 있는 곳에 있다. 
동헌은 현감이 집무를 보는 건물로 지금의 군청이라고 할 수 있다. 관아 안에서 객사에 버금가는 규모를 가진 수령의 정청이다. 동헌은 그 고을의 최고 실력자인 군수나 현감이 집무를 하는 공간인 만큼 함부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따라 동헌 내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읍성의 문을 지나 성안의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을 지나는 보통 네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해남현의 수령에 대한 기록은 1895년에 작성된『해남현읍지』선생안에 현감으로 왔던 인물들의 이름이 열거돼 있다. 이곳에는 유형(柳珩)부터 이규응(李奎應)까지 모두 192명에 달하는 현감이 기록돼 있는데 재임기간은 평균 약 2년6개월 정도였다고 한다. 
해남 현감『여지도서』에 문무교차로 한다고 돼 있고, 명단에는 문·무의 표시가 돼 있는데 이를 보면 전반적으로 무가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훨씬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해남현이 연해지역이어서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무관수령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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