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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문예르네상스 수묵화 길을 걷다 ① 남도 수묵화의 뿌리 녹우당] 호남화단의 양대 산맥 녹우당과 운림산방, 그림 풍은 달랐다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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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11  16: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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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 사실주의·풍속화 등 실학적 화풍특징
운림산방 - 남종화 일관, 남도 특징으로 성장시켜

 

전라남도는 2018년 전남 국제수묵화 비엔날레를 준비 중에 있다. 남도의 수묵화는 공재 윤두서로부터 시작된다. 이번 취재기획은 남도의 문화인 수묵화의 가치를 되살리고 해남 곳곳에 걸린 수묵화 작품을 일괄 조사해 해남의 로컬문화로서 수묵화를 일괄 정리하는 데 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남도 수묵화의 뿌리 녹우당
② 남종화, 공재에서 소치로 이어지다
③ 소치와 추사, 초의가 꽃피운 남종화
④ 한국 화맥에서 수묵화가 차지하는 위치
⑤ 배고픔, 그러나 수묵화를 이었던 해남 화가들
⑥ 수묵화를 지원한 해남 사람들
⑦ 수묵화 해남 어디에 걸려있나 
⑧ 전남 국제수묵화 비엔날레 우린 무얼 준비해야 하나

   
▲ 호남화단의 양대산맥인 해남 녹우당과 진도 운림산방은 모두 전통회화인 수묵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화풍은 사뭇 달랐다.(윤두서의 풍속화)

 해남을 비롯한 남도는 수묵화의 고장, 즉 남종화의 고장이다. 가정집과 식당, 사무실, 하물며 마을회관에도 수묵화 한 점 걸려 있을 정도로 수묵화는 남도인들의 삶과 함께했다. 
해남 진도 목포를 중심으로 발전한 수묵화는 해남윤씨인 공재 윤두서로부터 시작된다. 공재로부터 시작된 수묵화는 초의선사에 이어 소치 허유로 이어지면서 진도군은 남종화의 섬으로 인식된다. 
2000년도 초기까지 남도의 화가들은 모두 수묵화만을 그렸다. 가난한 화가들은 여관을 돌며 그림을 그렸고 해남의 유지들은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을 사주며 수묵화가 현대에 이르도록 지원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해남의 모든 공간은 수묵화의 갤러리가 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도의 특징인 수묵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전라남도는 2018년 전남 국제 수묵화 비엔날레를 준비 중에 있다. 남도 수묵화의 뿌리인 해남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했다. 
17세기 후기에 이르러 조선화단에 혁풍이 일어난다. 혁풍의 진원지는 해남읍 연동 녹우당이었다. 공재 윤두서(1668~1715), 조선의 미술사에 있어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도 크다.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 풍속화의 선구자, 서양식 정물화와 진경산수화의 선구자. 서양화법의 묘사법을 최초 응용한 화가 등 그의 이름 앞엔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또한 조선 후기화단에 크게 유행했던 남종화법을 선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조선후기 화단의 변화를 이끈 이다. 또한 그의 화풍은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으로 이어지면서 녹우당은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호남 화단의 중심이 된다. 
그 뒤를 잇는 이가 진도 출신인 소치 허련이다. 허련의 화실이었던 진도 운림산방은 이후 남종화의 중심지가 된다. 허련의 화풍은 그의 아들인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 방손인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지면서 호남화단을 주도한다. 따라서 해남 녹우당과 진도 운림산방은 조선후기에 이어 근대까지 호남화단의 중심이자 남도 수묵화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뿌리는 녹우당이었다. 이유는 소치 허련이 처음 그림을 접했던 곳이 녹우당이기 때문이다. 허련은 공재화첩을 통해 그림을 모사하며 그림의 진리를 터득했다.  
호남화단의 양대 산맥인 녹우당과 운림산방, 모두 수묵화라는 전통회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림 풍은 달랐다. 녹우당 화맥은 풍속화와 서양식 정물화, 사실주의 회화 등 철저히 실학적 사상에 바탕을 둔 다양한 화풍을 선보였다. 

 

   
▲ 허련의 남종화

이와 달리 운림산방 화맥은 남종화를 발달시켜 우리나라 화단에 남종문인화풍의 토착화 및 남종화를 남도회화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한다.
그렇다면 남종화 풍만을 고집스럽게 그리고 이었던 운림산방과 달리 녹우당 화맥은 왜 다양한 화풍을 선보였을까. 이유는 녹우당 해남윤씨 집안의 학풍에 기인한다. 녹우당 학풍은 고산 윤선도에서 명확히 특징지어진다. 고산은 한글로 시를 지었을 뿐 아니라 병법, 천문, 예악 등 박학다식을 추구했다. 간척사업에도 적극적이었고 자연을 거슬리지 않는 정원 조성 등 건축예술에도 뛰어났다. 고산은 철저히 실사구시적인 학문을 추구했고 여기에 예술적 감각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이러한 실사구시적인 학풍은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에게로 이어진다. 특히 공재 때는 실학이 발달했다. 
따라서 공재도 천문 지리 수학 병법 금석 음악 기예 등에 관심을 가졌고 실학적 사고를 그림으로까지 확대한다. 그의 자화상과 말 그림에서 보듯 대상의 실체를 정확히 묘사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태도와 풍속화와 서양화법의 적극적인 수용, 우리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시도 등 그의 그림은 실학적 태도가 짙게 깔려 있다. 박학다식을 추구했던 집안의 학풍과 실사구시적인 태도, 공재 당시 유행했던 실학적 풍토가 그에게 다양한 실험적 그림을 그리게 한 배경이 된 셈이다.
또한 그는 남인이었다. 당시 남인들은 정치진출이 철저히 차단됐다. 정치적 소외계층이었던 남인출신인 공재는 학문과 그림 등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다양한 작품세계를 탐구하고 창작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을 것이고 해남의 넓은 들녘과 주변 농민들의 삶은 풍속화와 진경산수화의 소재가 됐을 것이다. 공재의 이러한 화풍은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이어진다.   
이와 달리 진도 운림산방은 전통 남종화 풍을 고집한다. 소치 시대에는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가 조선의 화단을 지배할 때이다. 추사 김정희 이전에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와 정선의 진경산수화 등 다양한 화풍이 꽃을 피운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조선화단은 남종화 풍이 강하게 자리 잡고 풍속화와 진경산수화 등은 퇴보한다.
소치는 추사의 문하생으로 이름을 떨치며 다양한 사대부들과 교류한다. 또 헌종의 눈에 띄어 어전에서 그림을 그린다. 당연히 그는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남종화를 그렸고 또 당시엔 남종화풍이 인정을 받았다. 
소치는 추사로부터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그리고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해 남종문인화풍을 토착화시킨다. 
소치로 인해 남도는 남종화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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