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가 개창한 남종문인화…소치가 꽃 피우다
 

 

공재, 조선후기에 남종문인화 적극 수용
소치, 녹우당서 공재화첩 보고 화법 익혀

 

 공재 윤두서는 조선 후기 화단의 혁명아였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 사실주의 화풍 등의 선구자였던 그는 글씨에 있어서도 동국진체를 적극 수용했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 태동한 남종문인화도 적극 수용한다.
남종화는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 등의 내면세계를 그림에 담아내는 것으로 사물의 외형보단 사의적(寫意的) 측면을 중시한 화풍을 일컫는다.
이에 반해 북종화는 직업화가들에 의해 외형적 묘사에 치중한 기교적이고 장식성이 강한 그림을 의미한다.
남종화 또는 남종문인화로 일컬어진 이러한 중국의 화풍은 17세기에 이르러 조선 문인화가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공재 윤두서가 있다.
남종화는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선비의 이상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관념성이 강한 화풍이다. 백성들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와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던 그가 관념적인 남종화를 적극 수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학문을 적극 수용했던 해남윤씨가의 학풍인 박학다식을 추구했던 인물이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남종화 풍이 주로 소개된 고씨화보와 당시화보는 그에게 새로운 문화적 충격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또 양반사대부 출신인 그에게 있어 잔잔하고 격조 있는 남종문인화는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의 느낌을 안겨줬을 것이다.

 

공재, 남종화에 매료

공재는 중국의 소식, 조맹부, 전선, 왕유 등 중국 문인화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평하면서 그들의 그림에서 외형을 그리지 않고도 진의를 담아내고 형상을 그리지 않고도 정신을 그리는 문인화 정신에 매료됐다.
공재가 활동했던 17세기 조선 화단은 이징과 김명국의 주도하에 절파풍(도끼로 찍어내리는 듯한 거칠고 호방한 그림)이 크게 유행한 반면 남종문인화는 몇몇 작품에 불과할 만큼 빈약했다.
절파화풍은 거칠고 속도감과 호방함이 특징인데 반해 남종문인화는 정적이고 절제미가 특징이다. 따라서 공재는 선비의 미적 범주인 우아하고 절제된 남종문인화를 거친 절파화풍의 대안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공재 윤두서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의 시원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공재 이후 풍속화는 김홍도와 신윤복에 의해 꽃을 피우고 진경산수화는 정선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공재 사후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는 한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지만 이내 쇠퇴하고 남종문인화가 조선말기 화단을 휩쓴다.  
공재에 이르러 적극 수용하기 시작한 남종화가 조선 화단의 최강자로 떠오르게 된 데는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련 때문이다.  

 

소치, 초의를 만나다

 공재 윤두서(1668~1715) 사후 100여년 뒤에 진도에서 소치 허련(1808~1893)이 태어난다.
해남윤씨가의 풍족한 경제력을 물려 받았던 공재와 달리 소치 허련은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었다. 궁벽한 진도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림을 접할 곳도 배울 곳도 없었다. 
이 시기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는 걸출한 스님이 있었다. 초의선사, 중국차가 아닌 우리차의 부흥을 이끈 동다송을 저술한 이자 추사 김정희와 정약용 등 신진사대부들과 교류하며 조선후기 일지암을 인문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이다.
이곳에 소치가 찾아온다.
소치가 초의스님을 찾아간 때는 그의 나이 28세였다. 초의를 찾아온 소치는 초의 앞에서 그림을 그려 보였고 시서화에 능했던 초의는 그의 그림실력을 한눈에 알아본다. 그러나 화재(畵材)에는 능한데 서권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소치에게 경학과 선(禪)을 가르친다.

 

소치, 공재화첩 보며 그림 익혀

이후 초의스님은 소치에게 녹우당에 보관된 공재화첩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 소치는 이 화첩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데 법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소치는 공재의 그림뿐 아니라 공재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의 그림을 모사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녹우당 화첩을 통해 필력을 익힌 소치는 32세 때인 1839년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추사의 사랑채에 머물며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으며 김정희의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그리고 김정희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온 지 10년 만에 인생 최고의 영광스러운 시기를 맞이한다.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에 다섯 달 동안 헌종을 배알해 왕이 직접 내린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소치는 그림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시서화(詩書畫)에 모두 능했다.
특히 소치는 허모란(許牡丹)이라 불릴 정도로 모란을 즐겨 그렸다.

 

추사, 옛 그림은 공재에게 배워라

조선말에는 남종화가 대세였다. 남종문인화를 최고의 경지까지 이끈 추사 김정희, 그리고 남종화를 근대에 이어 현대까지 잇게 한 소치의 그림세계는 공재 윤두서로부터 기인했다.
추사는 소치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우려면 진정 공재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운(神韻)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겸재, 심현재가 모두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전하는 바의 권첩이란 한갓 안목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후기 남종문인화를 공재가 개창했지만 이를 더욱 발전시킨 이가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이었다.
김정희는 자신의 안목을 벗어난 작품에 대해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오만하기까지 했던 그가 공재 작품에 대해 신운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도 남종문인화의 출발점이 공재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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