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정씨 사위로 해리에 거주하며 제자들 양성
중국3대 기행문인 표해록에 화산 관두량도 기술 

 

▲ <표해록> 최부의 중국기행문으로 미암 유희춘이 간행했다.

해남은 남쪽의 외지고 궁벽한 곳이라 하여 한때 침명(浸溟), 또는 투빈(投濱)이라 불렀다. 그만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여건을 말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거리감 때문이었을까? 해남은 고려 때까지만 해도 역사를 통해 이렇다 할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 치소가 지금의 해남읍에 정해지고 해남정씨의 후원 아래 여러 인물들이 모여들면서 해남은 역량 있는 문인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중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인물을 우리는 금남 최부로 평가한다. 해남을 일약 학문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해남정씨가 넉넉한 가산을 배경으로 이러한 인물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면 금남 최부(1454~1504)는 그 기틀 위에서 학문을 통해 제자를 길러내 해남을 문향의 고장으로 만든다. 

해남인물사의 개산조

낯선 유배자나 드나들던 해남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며 16세기 조선 사림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것은 최부가 해남의 학문과 문화적 기틀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금남을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인물, 해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 부른다. 
금남 최부는 본래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서 태어났으나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면서 해남에 거주하게 된다. 
그는 김종직의 제자로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연루돼 김굉필 등 동문들과 함께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됐다가 갑자사화 때 처형당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당시 많은 인물들이 사화 속에서 유배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금남 최부 역시 사화의 한복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가 갑자사화로 처형당할 때 그의 가족은 이곳 마산면 버드나무골(상등리)에 살았다고 하며 무덤도 미암 유희춘의 아버지인 유계린과 함께 이곳 마산면 모목동(牟木洞, 미암일기에 모목동으로 나옴)에 있다가 이후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로 옮겼다고 한다.
최부의 외손자인 미암은 최부의『금남집』을 직접 편집하고 발문을 써 간행하기도 했다. 또한 최부의 중국 기행문인『표해록』을 60여 년 뒤 직접 간행한 것을 보면 그의 외조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금남 최부는 역사서인『동국통감』편찬에 참여하는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지만 최부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표해록』이다. 금남 최부가 쓴『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고 있다. 
해남은 금남의『표해록』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 중에 하나다. 해남의 화산면 관두량은 금남 최부가 중국으로 표류되기 전 제주로 떠났던 포구이다. 고려 때 중국과의 무역항이었던 관두량은 제주로 떠나기에 앞서 순풍을 기다리던 곳이다. 
금남 최부는 그의 나이 33세 무렵인 1487년(성종18) 7월 추쇄경차관에 임명돼 제주로 떠나게 되는데 그가 쓴『표해록』에는 제주도로 가기 위해 이곳 관두량에 머물며 배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 <화산 관두량> 고려 때 중국과 교류가 이뤄진 항구로 최부가 제주로 가기 전 배를 탔던 포구다.

최부의『표해록』을 보면 그는 관두량에서 제주 가는 배를 타기 위해 40~50일 정도 바람을 기다렸다가 배를 타고 이틀 만에 제주에 도착한 것으로 돼있다.
 풍랑 때문에 바로 배에 오르지 못하고 순풍을 기다렸다가 배에 오른 것이다. 
당시 바람을 이용한 돛단배를 타고 제주를 오갔던 때에 제주 가는 뱃길이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최부는 제주에 도착한 다음해에 부친상을 당해 황급히 나주로 가야 했다. 부친상이라 바람과 같은 여건을 고려하지 않았던지 돌아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최부 일행은 중국 절강성 부근으로 표류해 6개월여의 험한 노정 끝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는데 성종의 명으로 이 노정을『표해록』으로 작성한다.
『표해록』에는 최부 일행의 표류와 여정이 아주 세밀하게 기록돼 있어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해남에서의 최부의 의미

금남 최부는 해남읍 해리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해남의 재지사족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학문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미암 유희춘은 외조부 최부에 대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의 숙부인 임우리, 미암의 아버지인 유계린 등을 일컫는다. 
유계린의 아들이자 미암의 형인 유성춘과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인 귤정 윤구, 광양의 최산두는 호남 3걸로 추앙받고 있다. 
호남을 대표하는 호남 3걸 중 두 사람이 금남의 문하이자, 해남출신이라는 것은 당시 해남이 학문의 고장으로 우뚝 섰음을 알려준다. 

 

▲ 무안 몽탄에 있는 금남 최부의 무덤

최부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을 두었는데 첫째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 차녀는 나질, 셋째는 김분에게 출가했다. 현재 해남에는 최부를 모신 해촌서원이 있지만 그를 기억할만한 흔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해남을 ‘학문의 고장’으로 부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일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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