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마을 입향조들 정치적 박해 피해 낙향한 인사들 
해남, 중앙으로부터 멀고 물산 풍부해 은둔의 적지

▲ <석천 임억령의 묘> 석천 임억령은 사화에 연루된 것은 아니지만 동생 임백령이 을사사화의 주동인물이 된 것을 반대해 낙향한다. 그의 묘는 마산면 장촌리에 위치한다.

 우리역사에서 16세기를 흔히 ‘사림정치’ 시대로 말하고 있다. 
이 시대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같은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벌어졌던 사화(士禍)의 시대이기도 했다. 
16세기 사화기에 호남지방에서도 많은 문인학자들이 배출됐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언급했던 해남정씨 정호장 집안을 기반으로 해 성장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해남정씨와 최부의 문인들로 맺어진 혈연과 학연으로 얽혀 있었다.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등 당대의 인물들은 호남사림의 한 맥을 형성했다.  

호남에는 왜 사림이 많을까

조선 건국과정에서 역성혁명에 반대한 신흥 사대부들은 관직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방의 중소 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구축했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층을 등용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길재의 손제자인 김종직이 출사한 것을 계기로 또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훈구파의 비리를 공격했고 이로인해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탄시작됐다. 이때 일어난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파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호남 사림은 낙향한 재지품관과 이주한 사족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들은 여러 계보로 형성됐는데 해남 사림의 계열은 최부→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윤구, 윤행, 윤복, 유성호, 유희춘→이중호로 이어진다.
사림정치기에 해남에서 해남정씨와 최부를 통해 기반을 잡고 성장했던 인물들도 정치적으로 사화의 참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김종직의 문인인 금남 최부는 1498년(연산군4)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던 김일손이 쓴 조의제문(弔義祭文)이 문제가 된 무오사화로 단천(端川)으로 유배를 당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1504년(연산군 10) 4월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돼 다시 투옥돼 참수되고 만다. 
미암 유희춘의 어머니는 금남 최부의 둘째딸로 해남에서 태어나 결혼한 인물이다. 
미암 유희춘은 최산두와 김안국으로부터 사사했는데 김안국은 경기학파로 조광조와 함께 김장생의 문하생이었다. 명종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 되는데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잡자 유희춘 등 대간들을 파직하고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듬해 9월에는 전라도 양재역에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미암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당해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석천 임억령은 해남정씨 문명(文明)의 사위가 된 임수(林秀)의 손자이다. 석천은 사화에 깊이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동생 임백령은 호방하고 기백 있는 인물이어서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총애를 얻어 을사사화의 주동 인물이 된다. 
석천은 동생 백령이 불의의 사화를 주동하고 있음을 알고 거사를 중단하길 원하지만 듣지 않자 형제 의절을 선언하고 낙향해 버린다.
또한 여흥민씨 해남 입향조가 됐던 민중건(仲騫)은 계유정란 때 조부 민신(閔伸)을 비롯한 6부자가 멸문지화를 당했으나 종의 도움으로 등에 업혀 간신히 진도현감으로 있는 외삼촌댁으로 피신해 있다가 살아남은 인물로 이후 해남정씨에 의탁해 사위가 된 인물이다. 
해남윤씨가는 귤정 윤구를 들 수 있다. 윤구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3걸로 불려지는 인물이다. 윤구는 1513년(중종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사가독서 했으며,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됐으며 영암에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해남윤씨 가는 김종직을 문인으로 해 동서분당(동인․서인) 이후에는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윤의중(윤구의 아들)과 광주이씨가의 이발(1544~1589)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남북 분당 때 이발 가문과 같이 북인으로 진출하는 가문과 윤선도 같이 남인으로 진출하는 두 개의 당파로 나눠지며 이후 인조반정과 경신대출척 등을 거치면서 해남윤씨는 남인계열에 서게 된다. 
당시 이러한 사화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피난 내지는 낙향을 하게 된다. 마을의 입향조를 보면 이처럼 사화로 인한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박해를 피해 중앙으로부터 멀리 낙남해 온 가문들로 이들이 호남을 낙남의 대상지로 택한 것은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정화(政禍)가 미치지 않으며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해 은둔의 적지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시문학으로 꽃핀 사림의 호남가단
 

▲ <귤정 윤구의 묘> 해남윤씨 윤구는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돼 관직에서 삭직됐다가 영암으로 유배된 후 1538년 다시 복직됐다. 그의 묘는 북일면 갈두에 위치한다.

이 시기 호남 사림들은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많은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중에 ‘호남가단’이라는 말처럼 시문학과 예술의 꽃이 피어나기도 한다. 
사림이 추구한 개혁이 사화라는 파국으로 좌절되자 현실정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좌절과 퇴각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이념적으로 재충전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 시문학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시각이다. 
호남의 시문학과 예술은 당시 사화로 인한 정치적 부침 속에서 낙향한 사림들의 이런 이념적 재충전이 풍류정신으로 나타나게 됐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낙향해 시간적 여유가 많은 사림들이 고향에서 열심히 ‘수기’를 하면서 또 하나의 세계를 개척한 것이 이러한 시문학의 세계로 보는 것이다. 
이시기 호남의 시문학은 그 형세가 다른 어느 곳보다 융성했다. 한시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국문시가에서는 호남가단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 세가 컸다. 
어초은 윤효정과 윤구가 고향 향리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며 ‘수기’를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사림시대의 사화를 통한 정치적 역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시문학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는 고산 윤선도를 배출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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