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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가족과 함께 해남역사를…마한 최후 제국 ‘침미다례’ 나라전체가 도륙될 때까지…백제·왜에 저항했던 비운의 나라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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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29  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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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 영암 등 인근 세력은 항복해 자치권 인정
해남의 침미다례는 저항의 대가로 역사 속으로 소멸
읍 남성리 옥녀봉토성 발굴로 역사 수수께끼 밝히자

 

   
▲ 해남~완도 간 4차선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삼산 신금마을 마한시대 주거유적지는 대부분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어 전쟁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들녘과 풍부한 물산, 해상 교통의 요지까지 두루 갖춘 해남의 마한세력은 왜의 침략에 끝까지 대항했다. 나주 반남과 영암 등 인근 지역 세력들은 일찌감치 항복을 했지만 해남 세력들은 그렇지 않았다. 전 도시가 완전히 도륙당할 때까지 저항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들이 세운 마을과 산성은 사라졌고 나라의 이름마저도 후세에 남기지 못했다.   
마한의 여러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맹주국이었고 국제 해상교통의 중간기착지였던 현산면 백포바닷길의 이점을 살려 중국과 일본, 가야와의 중개무역으로 더욱 풍요로움을 누렸던 침미다례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 옛 기록에는 마한민족은 산성을 쌓지 않았고 말을 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화를 사랑했던 나라, 해상무역을 통해 풍요를 누렸던 이들에겐 전쟁을 방어해야 할 산성도, 정복국가의 상징인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해남읍 남송리 앞산 옥녀봉에 산성을 쌓고 산 정상에 산성도시를 세웠다. 방어의 상징인 산성을 조성할 만큼 주변정세는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 긴박감을 반영하듯 중국에 사신까지 보냈다.   

중국, 일본, 가야와 교류 

   
▲ 마한의 최후제국 침미다례는 옹관묘를 사용했다. 침미다례 멸망이후 해남에선 옹관묘제는 사라진다. (광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화산면 부길리 옹관묘)

한반도에 마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세기이다.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에 걸쳐 존재했던 마한은 54개국의 연맹체 국가였다. 
그런데 연맹체 중 백제가 성장하더니 마한의 소국들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3세기경에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까지 점령하며 연맹체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에 반발한 침미다례는 나머지 소국들을 결집해 연맹체의 맹주임을 자처하고 나선다. 경기, 충청의 마한세력들은 백제를 중심으로, 전남북에 걸쳐있던 마한세력들은 침미다례를 중심으로 한 두 개의 연맹체가 존재하게 됐다. 이들은 마한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했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며 외교전을 펼쳤다. 
목지국 중심의 역사서술로 인해 침미다례는 생소한 이름이 됐지만 마한의 29개 연합국가를 대표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을 만큼 큰 국가였다.   
침미다례는 해남에 위치했다. 육지를 중심으로 놓고 볼 때 해남은 분명 끝이다. 그러나 바다가 교통의 중심이었을 때는 해남은 중국, 일본, 가야, 그리고 중국 한나라가 세운 대방, 낙랑과 교류하는 중심 길목이었다. 해남 앞바다로 들어온 각종 물자와 문화는 영산강을 통해 육지의 마한 소국들로 전해졌다.

29개국 대표로 중국에 사신 파견

   
▲ 화산 석호리 도로건설 구간에서 발굴된 마한시대 대규모 고분군은 마한의 중심세력이었던 침미다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왜가 성장하기까지 전남북에 위치했던 마한소국들은 평화로웠다. 중국 한나라가 세운 사군현과도 거리가 멀었고 가야와 신라와의 사이에 진한 변한이 있어 전쟁의 경험도 없었다.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듯 이들은 성도 쌓지 않았고 말도 타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 등 숱한 전쟁으로 얼룩진 중국인의 입장에선 하얀 옷을 즐겨 입었던 침미다례는 엘도라도 같은 수수깨끼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한 침미다례가 산성을 쌓고 중국 진나라에 사신까지 보냈다. 잠깐 이 시기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침미다례가 번성을 누리고 있을 때 중국은 오와 촉, 위나라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였다. 
조조와 제갈량, 유비와 관우, 손권이 등장하는 삼국시대, 승자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였다.
조조 사후 그의 신하였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내며 촉나라를 멸망시켰고 그의 손자 사마염은 손권이 세운 오나라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다.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조조가 건국한 위나라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며 동양의 강자로 군림한다. 
사마염 통치 시기 한반도 땅끝에 위치했던 침미다례도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중국 사서인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동이마한 신미제국(東夷馬韓 新彌諸國)이 282년에 사신을 보냈다. 여기서 말하는 신미제국은 일본서기에 나온 침미다례이다. 

왜의 침략에 저항 그리고 도륙

중국에 사신을 보낼 만큼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던 침미다례는 이후에도 해상교역을 통해 번성을 누린다. 침미다례가 번성을 누리던 때 작은 나라였던 백제가 성장하고 백제의 위대한 군주,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른다.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을 점령한 근초고왕의 시선은 만주 등 끝없이 펼치진 북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313년 낙랑을 멸망시킨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본격화됐다. 북으로 향하려던 백제와 남쪽 정벌에 나선 고구려와의 대치, 고구려와 일전을 앞둔 백제의 입장에선 후방인 서남해안의 안정이 우선이었다.
백제는 신라를 압박해 고구려와의 동맹을 저지하고 가야와 마한연맹체를 제압해야 했다. 특히 침미다례는 연맹체를 대표해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독자적인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어 가볍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서기 신공왕후(369년)조에 왜는 가야 7국을 치고 서쪽으로 군사를 몰아 고계진을 점령한 후 남만의 침미다례(신미제국)를 도륙해 근초고왕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과 관련해 여러 의견이 존재하지만 한국 학자들 내에서는 일본군과 백제 근초고왕의 연합군이 침미다례를 점령한 것으로 해석한다. 누가 점령을 했던 이 기록에는 침미다례를 남만이라 표기했다. 남쪽의 오랑캐, 또 점령과 정복도 아닌 도륙이라고 했다. 적대성이 강한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백제와의 적대관계 그리고 이들 집단의 강한 저항을 의미한다. 
남쪽의 오랑캐로 명할 만큼 침미다례는 백제와는 다른 토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무덤은 옹관묘, 또 활발한 해상교류를 통해 가야의 고급스러운 토기를 사용했고 금보다는 옥을 유난히 좋아해 각종 옥장식품을 몸에 지녔다. 
근초고왕은 후방의 골칫거리인 침미다례가 도륙되자 그 여파를 몰아 371년 겨울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마지막 마한제국의 소멸

침미다례의 도륙은 마한의 마지막 저항세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나주 반남의 마한소국들은 항복의 조건으로 일정정도 자유권을 갖는다. 
마한시대의 대표적인 묘 양식은 옹관묘이다. 나주 반남과 영암 등지에선 5세기 이후에도 옹관묘가 나온다. 토착세력의 지배권이 인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침미다례가 존재했던 해남군은 침미다례 멸망 후 옹관묘 양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너무도 이질적인 왜의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과 즙석분, 횡렬식 석실분 등이 등장하고 전쟁의 상징인 말 관련 유물들도 출토된다. 
또 산성도 곳곳에 조성된다. 마한과의 완전한 단절, 새로운 세력이 해남을 장악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일본은 임나본부를 주장한다. 한때 해남을 비롯한 서남해안이 일본의 땅이었다는 주장이다. 
근초고왕 시절 영토 확장을 꾀했던 백제는 이후 고구려에 광개토왕이라는 위대한 군주가 등장하자 고전을 면치 못한다. 광개토왕은 남으로 영토 확장을 꾀하면서 백제를 압박한다. 
이 시기를 기록한 일본서기에는 왜왕은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대왕 앞에서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며 영원한 노객(신하)이 될 것을 맹세한 것을 불쾌하게 여겨 369년에 점령해 백제에게 주었다는 침미다례를 다시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역사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들며 침미다례가 위치한 곳은 한때 일본 땅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어찌 됐던 침미다례가 멸망한 이후 해남 땅에선 백제의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5세기에 해당되는 현산면 조산 고분군과 삼산 용두리고분, 옥천 성산 만의총 3호분, 북일 신방리 즙석분 등에선 가야계통과 신라, 일본 계통 유물만 출토됐다. 
일본의 주장과 달리 한국의 학자들은 침미다례 멸망 이후에도 해남과 나주, 영암 등지에는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주장의 진위를 떠나 마한의 마지막 중심세력은 해남에 있었고 이들은 저항의 대가로 소멸된 것만은 확실하다.       

옥녀봉 토성이 주목받은 이유

   
▲ 해남읍 남송리와 삼산면 경계에 위치한 옥녀봉 토성은 산성 안에 도시가 형성돼 있어 침미다례가 조성한 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해상무역을 통해 풍요를 누렸던 침미다례의 중심도시는 해남 어디에 위치했을까. 
송지면 군곡리와 해남읍 남송리 앞 옥녀봉 토성 2곳이 거론된다. 현재 제3차 발굴이 진행 중인 송지 군곡리 패총지는 국제 해상도시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다만 옥녀봉 토성은 미발굴지이다. 옥녀봉토성이 주목되는 것은 산성 안에 하나의 도시가 형성돼 있었을 것이란 데서 출발한다. 전쟁을 몰랐던 마한인들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주변정세를 의식해 산성을 짓고 그 안에 도시를 축성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유는 옥녀봉 토성을 중심으로 삼산면과 화산, 현산면 등지에서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물들이 다량 발굴되고 있고 옥녀봉 안에서도 3~4세기까지의 유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옥녀봉 아래에 있는 삼산면 신금마을에서도 이 시기에 해당되는 주거 터가 다량 발굴됐는데 대부분 불에 탄 집터였다. 불탄 집터는 커다란 전쟁, 일시에 도륙됐음을 의미한다.
하나의 국가가 아닌 소국들의 연맹체로만 인식된 마한은 잊혀진 나라가 됐다. 
특히 승자 중심의 역사기록으로 마한은 백제의 언저리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송지 군곡리 패총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면 이곳이 700년간 유지된 터였음을 알려준다. 옥녀봉 토성도 청동기에서 기원후 4세기까지의 유물들이 나온다. 
마한의 역사는 나주 반남과 영암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 결과 나주에 국립나주박물관이 건립된다. 그런데 최근 마한의 중심지가 해남이었고 마지막 제국도 해남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옥녀봉 토성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이다. 
옥녀봉 토성이 발굴되면 마한시대 중심제국인 침미다례의 위치와 함께 그 규모도 정립될 것이다. 또 해남 곳곳에서 발굴되는 마한시대 유적들과의 관계도 밝혀질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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