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 월송 출신 해남 마지막 빨치산
중학교 때 공개처형장에 동원돼 목격

 

 때는 1947년, 바야흐로 보리가 한창 피려는 5월 어느 쾌청한 날이었다. 
둘째시간 수업을 마치고 이제 좀 한숨 돌리려는 무렵이다. 때아닌 학교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종소리가 아니라 마구 치는 난타소리였다.
“웬 종소리야?”
학우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급장이 “전교생 집합이래, 빨리 나가보자”라며 모자를 서둘러 쓰고 나가자 우리들도 우르르 운동장으로 달렸다.
조회대 위에선 배속장교가 먼저 나와 큰소리를 지르며 전교생들에게 집합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지금부터 경찰서까지 행군이다. 오늘은 장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행군을 지켜볼 것이다. 질서정연하고 씩씩한 해남중학교 학도호국단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알겠나”
큰 소리로 호령하던 그는 줄 맨 앞에 서서 우리들을 인도했다.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해남경찰서 후정인 기마대 광장이었다. 당시 해남경찰서는 순찰 때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군마를 이용하고 있었다. 또 그 당시 경찰서는 해남군청 앞인 지금의 군민광장에 위치했다. 
기마대 광장에는 임시로 급조된 가설무대가 설치돼 있었고 무대 위에선 곱게 단장한 중년 여성 소리꾼이 손부채를 흔들며 열창하고 있었다. 기마대 광장 주변에는 동원된 군중인지, 아니면 장을 보러온 사람들인지 수많은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호기심에 여기저기 사방을 둘러보다 문득 무대 밑 한켠에 포승줄에 묶여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 없는 험한 몰골의 사람을 보게 됐다. 순간 나의 시선과 발걸음은 동시에 멈췄다.
그 언제였던가. 그림이나 사진에서 봤을 어느 사형수의 무서운 모습.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뒤덮였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요. 구겨지고 찢겨지고 피멍으로 얼룩진 중의적삼 등.
마침 그는 무대 위 국악인을 쳐다보느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번쩍 광채가 인 것 같았다. 불타고 있었다고나 할까. 이글거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 눈빛이 좀처럼 내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내 주변에서 들리는 말소리. “저 사람이 반란군 두목이래, 그 뒤 두 사람은 그 부하이고” “맞아 이름은 신동기인데 현산 월송 사람이야”
멈춰진 내 시선과 발걸음에 “야 인마 우두커니 서서 뭣 하냐, 어서 가지 않고” 등 뒤에서 어느 학우가 내 어깨를 밀기에 비로소 나는 정신을 차렸다.
또다시 행군이 계속되었다. 기마대 광장에서 반란군을 공개시킨 것만으로는 어딘가 서운했던지 꽁꽁 묶인 반란군 3명을 앞세워 시내 한 바퀴를 돈 후 사형 집행장으로 간다는 것이다.
사형집행장은 고도리장터를 벗어난 보리밭이었다. 경찰은 우리들을 비롯한 구경꾼들을 신작로에 정렬시킨 후 목소리를 높여 일장경고를 했다.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살인 방화를 일삼은 반란군의 최후를 보게 될 것입니다. 행여라도 앞으로 어떤 사태에도 동요하지 말고 봐주기 바랍니다”
이윽고 반란군 3명을 보리밭 저 멀리 데리고 가더니 묶인 밧줄을 풀어주면서 너희들 맘대로 가라고 외친다. 순간 반란군들은 앞다퉈 뛰기 시작했다. 
“사격” 기다렸다는 듯이 사수 3명의 총구에서 불꽃이 튕겼다. 2명은 바로 쓰러졌고 한명은 저만치 뛰다 그 역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 한발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뛰는 생의 마지막 몸부림.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외친 인민공화국 만세. 그들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렸을까. 너무도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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