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면 신흥리 한지붕 2가정
지붕은 하나인데 색은 달라

 

▲ 분명 한 지붕인데 지붕 색이 다르다. 산이면 신흥마을의 한 지붕 두 가족은 1970년대 해안선에 자주 출몰했던 간첩 때문에 생겼다.

 간첩 때문에 생긴 집, 강제 이주의 흔적이자 마을의 특색이기도 했던 산이면 신흥마을의 한 지붕 2가정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신흥마을에 가면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 있다. 분명 집은 두 집인데 지붕은 하나라는 것이다. 
두 집은 한 지붕 아래서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지붕개량도 하고 싶고 지붕에 색도 칠하고 싶어졌다. 두 집의 취향이 같으면 문제가 없지만 세상사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 않듯 시간이 흐르자 두 집을 덮고 있던 지붕의 색과 물받이 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흥마을의 이 같은 집 구조는 1960~1970년대 발생한 간첩단 사건이 발단이었다. 

 1968년 7월 목포에 민간 선박으로 가장한 공작선의 침투에 이어 1971년 10월 신안군 소허사도에 간첩단이 출몰한 사건이 발생했다. 침투 간첩은 모두 사살됐지만 정부는 바닷가 외딴 마을의 가정집이 간첩들의 은닉처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바닷가 마을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생겨난 곳이 산이면 신흥리 마을이다. 또 신흥뿐 아니라 흑두리와 부동리, 황조리, 화원면 월산마을에도 바닷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이때 정부의 이주조건은 슬레이트 지붕의 새집과 4만5000평의 야산개간이었다. 그런데 새집이란 게 한 집을 두 개로 나눈 것이다. 
신흥리에는 총 8채의 집이 들어섰고 집의 규모는 16평, 그것을 둘로 나누니 각각 8평에서 이주가족은 생활했다. 또 마당도 80평을 각각 40평씩 나눴다. 이 집들은 초가와 흙집이 대부분이던 당시에는 현대식 고급주택에 속했다.
또 지붕만 같이 사용했을 뿐, 집 번지는 명확히 구분됐고 마당도 담장이 갈라놓아 생활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붕을 개량하고 싶고 주인의 취향도 서로 달라 지붕색이 달라지게 됐다. 마당의 형태도, 집안의 구조도 변화를 맞았고 많은 집들은 새로 짓거나 한쪽 집에서 상대 반쪽 집을 사들여 집을 확장하기도 했다. 

 지난 2013년에는 2집만 과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한 집만 남아있다. 남아있는 집의 지붕색은 여전히 다른 색이다. 지붕을 중심으로 마당까지 정확히 양분된 이 집은 한쪽은 정갈한 형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반쪽은 쓰러져가는 폐가로 남겨져 있다.
한 지붕 아래 너무도 다른 풍경의 두 집, 그곳은 농촌의 쇠락과 함께 남북 분단이 낳은 풍경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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