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에게 첩은 몸에 유익하지 않다…「미암일기」 속 해남

 

 

미암의 사위 윤관중에 대한 사랑, 일기에 소상히
사돈댁인 해남윤씨가와 활발한 왕래도 소상히 기록 

 

 

재지사족들이 활발히 중앙에 진출하던 16세기 사림정치기, 해남출신의 인물들도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고 유력한 집안들끼리 통혼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 간다. 
서울(중앙)과 지방이 쉽게 오가게 된 것은 아마도 이시기 무렵부터일 것이다. 해남은 서울에서 보면 아주 외지고 먼 변방에 불과해 그다지 교류가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울과 해남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것을 유희춘의『미암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미암 유희춘은 유배에서 해배된 후 관직에 있으면서도 해남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가는데 그것은 해남의 사족들과의 교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해남윤씨가 사람들과 사위 윤관중의 관계, 해남에 살고 있는 누나인 ‘오자吳姉’, 그리고 첩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다.
『미암일기』는 사람들이 서울과 해남을 끊임없이 오가고 미암도 직접 휴가를 내 찾는 등 16세기 당시 서울과 지방의 교류가 활발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 묘비에는 선전관 윤관중의 묘비라 새겨져 있다.

사위 윤관중의 서울 처가살이

미암의 사위인 윤관중은 미암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처가살이를 한다. 
우리나라는 17세기 무렵까지도 남자가 결혼을 하면 처가살이를 하는 남귀여가혼이라는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처가살이 덕분에 윤관중은 서울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벼슬까지도 하게 된다.
당시의 양반사족들은 주로 유력한 집안끼리 통혼관계를 맺었는데 미암의 딸은 윤항(윤효정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윤관중과 결혼을 해 윤관중은 미암의 사위가 된다. 당시 재지사족들은 이러한 통혼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고 문중 간의 결속을 다졌다.
미암이 윤효정의 여러 아들 중 왜 윤항의 아들을 사위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윤항은 윤구, 윤복, 윤행 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나 그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암은 특히 해남윤씨 사람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울에서도 미암은 해남윤씨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오갔다.

1567년 11월 15일

“참판 윤의중과 이중호, 첨지 윤행, 전 안동도호부사 백유온, 고리 신웅시, 예조정랑 이중, 병조정랑 윤강원 … 객들이 가버린 뒤에도 윤의중과 윤행, 그리고 이중호가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판 윤의중이 오력을 주겠다고 했다.”
이날의 일기를 보면 당시 서울에 있던 해남윤씨 집안사람들이 모두 미암의 집에 찾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암일기』를 보면 윤관중은 스스로 과거에 합격할 만큼 그리 학식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미암에게는 ‘경렴’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미암은 사위 윤관중에게 아들 못지않게 관심을 기울이며 ‘선전관宣傳官’ 이라는 관직을 갖게 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사위가 선전관으로 임명된 것도 유희춘이 노력한 결과였다. 
윤관중에 대한 배려는 아들 하나를 맡아 교육시키는 것과 같았다. 유희춘 내외는 사위가 선전관이 되자 온 집안과 함께 기뻐하며 사위의 면신례에 필요한 술과 안주를 준비해 주기도 한다. 

▲ 마산면 상등리 모목동은 미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사위 윤관중의 묘가 이곳에 있다.

생활필수품의 교환

윤관중은 유복한 해남윤씨 윤항의 아들이었다. 사돈인 윤항과 유희춘은 서로 간에 잦은 교류를 하게 되는데 윤항은 아들이 머물고 있는 서울의 사돈댁에 쌀, 목화, 생선 등을 보냈으며, 어려울 때는 윤관중이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또한 윤항은 유희춘이 집 짓는 데 필요한 물품과 노비를 보내거나 유희춘이 빌린 집의 내청을 내주도록 주선해 주기도 하며, 유희춘이 귀양 가 있는 동안 책을 맡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도움을 주는 윤항에게 유희춘은 인사 부탁을 들어 주거나 장지壯紙를 보내는 것 등으로 보답했다. 
윤관중은 공부하는 것보다 사냥이나 노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아버지 윤항과 미암을 걱정하게 만들었는데 미암은 이런 사위에게 학문에 열중할 것을 타이른다. 이로 인해 윤관중은 마음을 다잡고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윤항은 자식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사돈인 유희춘에게 편지하기를 “감격하오니 어떻게 영공의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윤관중은 명망 있는 장인의 보살핌 아래서 학문과 인격을 닦는 기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윤관중은 관직생활 내내 주위의 질시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어렵게 얻은 관직에서 36개월 만에 파직당하고 만다. 그런데 윤관중은 파직을 당해 유희춘을 실망시키면서도 첩을 얻어 장인 유희춘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때 유희춘은 윤관중에게 “첩이 몸에 유익하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사위가 장마비를 무릅쓰고 첩을 찾아 먼 길을 떠나자 “몹시 안타깝다. 한스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이 첩을 두는 것이 용인됐으나 같이 살던 장인, 장모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암의 사위에 대한 사랑은 극진해 윤관중이 처와 다투고 방에 들어가지도 못해 마루에서 자다가 감기가 걸려 그날 출근을 하지 못하자 직접 사위가 근무하는 관청에 이를 알리고 약을 지어 보내기도 한다.

▲ 묘 앞 문인석인 선전관이었던 윤홍중을 닮았을까?

1573년 10월 11일

“어제 윤관중이 중풍 증세가 있다 하여 감군에 나가지 않았기로 병조와 본청에 도모해 주고 의원과 약을 보냈다. 오늘 아침에 들으니 초 9일 밤에 그 처와 다투고 사랑의 찬데서 누워 있다가 귀에 바람이 든 것을 그렇게 말했다 한다.”
미암은 사돈관계인 해남윤씨가 와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해남에 내려갔을 때에는 백련동(녹우당)에 가서 집안사람들과 만나 한가로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1567년 12월 14일

“새참에 백련동의 생원 윤항 댁에 가서 윤항, 안동부사 윤복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복과 장기를 두었다. 그들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윤항이 인배에게 벼 한섬을 주었다.” 
이처럼『미암일기』를 통해 볼 때 해남은 외진 변방이 아니라 서울과 수시로 사람들이 오가고 교류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교통이 체계적으로 발달하고 해남의 인물들이 중앙의 관직에 진출해 해남을 자주 오가게 된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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