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 학술대회 통해 마한시대 복원
전국 흩어진 해남유물 전수조사도 실시

▲ 해남은 땅만 파면 마한시대 유물이 쏟아진다. 마한 29개국을 통솔한 침미다례가 해남에 있었다는 사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해남군은 학술대회 등을 통해 마한시대를 복원한다. (화산 석호리 고분군)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침미다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마한의 정통성을 놓고 백제와 경쟁했고 백제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전을 펼쳤던 침미다례, 지난해는 화산면 석호리 도로공사 발굴로 침미다례 실체가 세상에 나왔다면 올해는 그 역사가 복원되는 해이다. 
그동안 침미다례 위치는 나주 반남과 영암 시종일대로 추정됐다. 그 결과 나주에는 마한시대를 대표하는 국립나주박물관이 들어서게 됐다. 그런데 해남에서 마한시대에 해당되는 대규모 집터와 공동묘지인 옹관묘 터가 연이어 발굴되고 있다. 
도로공사 중 실시되는 지표조사로 드러나고 있는 마한시대 집터와 옹관묘 터는 삼산 신금리와 현산 분토리에 이어 지난해 화산 석호리에서 연이어 나타났다. 해남에선 땅만 파면 마한시대 집터와 옹관 파편 등이 발굴되자 침미다례가 해남에 있었을 것이란 그동안의 소수의견이 주류학설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지난해 화산 석호리 마한시대 유적지 발굴로 침미다례가 해남에 있었다는 학설이 힘을 얻자 해남군은 올해 상반기에 해남 고대사를 규명하기 위한 학술대회를 연다. 해남 고대사 규명내용의 중심은 침미다례의 위치와 복원이다. 
또 침미다례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옥녀봉의 가치도 거론된다. 해남읍과 삼산면 경계인 옥녀봉은 산성 안에 말 연습장과 제사터, 집터 등이 있어 산성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남군은 해남의 고대사 학술대회를 통해 침미다례를 복원하고 그 여파로 옥녀봉 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까지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침미다례에 대한 기록은 중국 사서인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나온다. 
이때 기록에 “동이마한 신미제국(東夷馬韓 新彌諸國)이 282년에 사신을 보냈다” 여기서 말하는 신미제국은 일본서기에 나온 침미다례이다. 침미다례가 마한의 29개를 대표해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백제의 남하정책에 위기를 느끼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전이었다. 백제에 대항하며 중국에 사신까지 보낸 침미다례는 4세기경에 사라진다. 해남에서 발견되는 마한시대 유물들도 침미제국의 종말과 함께 사라진다. 침미다례는 누구에게 멸망당했을까. 한국과 일본 간에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침미다례에 대한 기록은 중국 진서에 이어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일본서기 신공왕후(369년) 조에 왜는 가야 7국을 치고 서쪽으로 군사를 몰아 고계진을 점령한 후 남쪽 오랑캐인 침미다례를 도륙해 백제 근초고왕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일본서기에는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대왕 앞에서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며 영원한 노객(신하)이 될 것을 맹세한 것을 불쾌하게 여겨 369년에 점령해 백제에게 주었던 침미다례를 다시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침미다례를 일본이 도륙한 후 백제 근초고왕에게 주었고 이후 백제왕으로 오른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굴복하자 화가 난 일본 왕이 다시 침미다례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인해 일본은 침미다례가 위치한 해남을 비롯한 서해안 일대와 영산강, 가야일대가 한때 일본 땅이었다는 임나일본설을 주장한다. 

▲ (송지 군곡리 패총 유물)

 일본의 주장 여하를 떠나 침미다례의 위치가 해남이었다는 사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올해 학술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논거 등이 제시될 전망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해남에서 발굴된 마한시대 유물들은 전국 박물관과 연구소 등에 흩어져 있다. 이에 해남군은 지난해 10월부터 해남유물 전수조사에 들어갔다. 해남 발굴 유물이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학술조사내용과 함께 기록하는 작업이다.
이어 해남군은 해남의 모든 유물과 유적,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해남사이버 역사박물관 준비도 들어갔다. 올해 초에 들어가 내년 말에 완료될 해남사이버역사박물관에는 해남의 역사와 유물, 유적지, 문화 등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해남군의 지난해 성과는 그동안 등한시됐던 해남고대사 발굴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는 점이다. 마한시대 해당되는 송지 군곡리 패총지 발굴에 이어 신라 말에 해당되는 화원 초기청자 도요지 발굴, 해남읍 뒷산인 금강산성 시굴조사 등이다.
여기에 향토역사 전시관도 구상 중이다. 해남은 마한시대 중심 국가가 위치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인 초기청자 도요지 및 고려시대 산이 진산리 도요지, 5~6세기 해상세력의 무덤인 다양한 고분군 등이 분포돼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모두 전국에 흩어져 있다. 
그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은 그 지역에 있어야 역사적 의미가 있고 그 역사를 통해 지역의 정체성과 긍지가 살아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온 것이다. 
해남군도 공감하는 내용이다. 
해남고대사 학술대회로 침미다례가 해남에 위치했다는 것이 공식화되면 해남은 마한의 중심지로 부각되게 된다. 
여기에 우리지역 유물을 주인인 우리가 보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역사전시관 건립이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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