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부처의 미소…중앙 진출 꿈꾼 해남호족의 간절한 염원일까 

 

 

은적사 철불, 근엄한 미소 아닌 인자한 남도의 미소
화려한 금불상 아닌 서민적인 철불 누가 만들었을까

▲ 남원 실상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개창한 실상산파의 본거지입니다. 이곳 철불은 크기가 226c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입니다.

 근엄한 미소가 아닌 인자한 저 미소를 누가 만들었을까요. 완벽한 신의 미소와 세속화된 인간 미소 중간쯤의 미소, 정말로 기분 좋은 미소입니다. 
마산면 은적사 철불, 금강산 아래 꼭꼭 숨어있는 사찰에 그토록 인자한 불상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그것도 화려한 금동불이 아닌 서민적인 철불을 말입니다.  
바다를 얻는 자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통일신라 말, 왕위쟁탈전과 귀족사회의 부패로 왕권이 붕괴돼 갑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장보고입니다. 중국과 일본을 잇는 전남 서남해안 바다에 눈을 돌린 장보고는 이를 바탕으로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막강한 군사력과 재력을 쥐게 됩니다. 한마디로 장보고의 활약으로 전남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으로 연결되는 해상교통 길은 해적으로부터 안전한 바닷길이 됩니다. 
이때 신라승려들이 장보고의 해상세력에 힘입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주로 화엄종 계열이었던 스님들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선(禪)에 심취합니다. 그리고 귀국 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엽니다. 구산선문은 당시 불교 사상계를 주도한 선종의 아홉 갈래의 승려집단을 일컫습니다.

장보고 바다 따라 승려들 당나라로

당시 신라 불교는 경전 중심의 교종이었습니다. 경전중심의 불교는 글을 모르는 민초들에겐 그저 어렵고 난해한 종교였지요. 당연히 교종은 중앙귀족의 소유물로 전락합니다. 이에 반발해 나타난 불교사상이 선종입니다. 글을 몰라 경전을 읽지 못해도 수행을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주관적 사유의 불교가 선종입니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선종의 선사상을 배운 신라 승려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 중앙귀족과 결탁돼 있는 교종세력과 달리 지방의 깊은 산속에 터를 잡습니다.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 강릉 굴원사의 사굴산문 등 선종구산(禪宗九山)이 속속 개창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당나라에서 선을 배운 이들 승려들이 귀국하던 시기는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운 신진세력으로 등장하던 때였습니다. 지방의 호족세력들에게 있어 선종의 사상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사상은 누구나 실력을 닦고 쌓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호족들의 정치이념과도 맞아 떨어졌지요. 따라서 선종계열 스님들은 지방호족세력들의 지지를 얻으며 민중 속으로 파고듭니다.

지방으로 온 불교, 철불 제작

민초 속으로, 지방 속으로 들어온 불교는 이제 화려하고 귀족적인 금불상이 아닌 철로 된 불상을 제작합니다. 
철불은 금동불보다 제작비용이 적게 듭니다. 국가 차원이 아닌 지방호족의 입장에선 제작비용이 적게 든 철불을 선호했을 것입니다. 또 작은 비용으로 무인의 기질을 보여줄 큰 불상 제작이 가능했기에 이 시기 제작된 철불의 규모는 대부분 큽니다. 
또 호족들은 사병들을 거닐고 있었기에 무기와 용구들을 자체 제작했고 따라서 철은 항상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신라 말 철광채굴이 증가했던 것도 더 쉽게 철을 구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지요. 
물론 철불은 제작과정이 금동불보다 까다롭습니다. 온도가 내려가면 빠르게 응고되기 때문에 섬세한 기법을 넣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작기간이 짧고 견고하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영웅호걸들의 등장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의 개창과 함께 등장한 철불은 고려 초까지 지방 사찰에서 활발히 제작됩니다. 

마산면 은적사 철불도 신라 말의 기법을 이어받은 고려 초 불상입니다. 은적사 철불이 제작됐던 시대로 거슬러 가 봅니다.
전남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벌이던 장보고가 841년에 부하인 염장에 의해 암살을 당합니다. 바다는 다시 주인을 잃고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들의 각축장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장보고 사후 반세기만에 서남해안 바다에 능창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장보고의 활동무대가 완도 청해진이었다면 능창의 무대는 신안 압해도였습니다. 능창은 장보고가 구축한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중국 및 일본과의 해상활동을 전개합니다. 
능창이 서남해안 해상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던 시기, 왕건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합니다. 또 견훤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중국 영파~흑산도~서남해 항로인 남방항로를 통해 중국 강남의 오월국 및 후당과 교역을 합니다.
903년 3월 이후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의 남하가 시작됩니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수차례 남하해 견훤과의 해상전투를 치르고 910년 진도군을 차지하면서 서남해안 해상권을 장악합니다.     
왕건의 서남해안 진출은 견훤의 배후에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고 나아가 견훤의 중국 해상로를 봉쇄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안 압해도에서 활동하던 능창 때문에 애를 먹습니다. 능창은 견훤 이전에 먼저 제압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수전에 능해 수달이란 별명이 붙은 능창은 결국 왕건의 유인책에 의해 생포되고 궁예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이후 왕건은 견훤을 이기고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그리고 행정구역을 개편하는데 이때 지금의 화원면인 황원현이 황원군으로 승격됩니다. 

지방호족세력과 화원도요지

황원현의 승격은 화원에 분포된 100여 기의 초기청자 가마터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당시 청자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왕건의 서남해안 진출의 첫째 목적도 화원가마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100여 기에 이르는 화원지역 초기청자 도요지를 운영한 이는 해상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지방호족세력이었을 것입니다. 그 호족은 처음엔 장보고와 이후엔 능창과 그리고 견훤 및 왕건과 직간접인 인연을 맺으며 해상무역을 전개했을 것입니다. 그 시기 은적사 철불이 제작됩니다. 
해남바다는 서해와 남해를 L자로 연결하는 요충지였고 당연히 한·중·일 고대문화 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중국 남부의 절강성 복건성 등에서 출발한 배들은 흑조해류의 흐름에 따라 북동진하다 화원·산이반도 해안선의 포구에 이릅니다. 또 해남바다는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학적인 인연으로 화원면 서동사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했던 최치원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하며 화원 양화리 안쪽에 있는 당포(唐浦) 마을은 당나라로 가는 포구였습니다. 
해상교통로로 일찍이 중국의 청자기술을 받아들었던 해남의 호족세력은 선승들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선종도 쉽게 수용합니다. 은적사 철불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합니다.  

지방호족, 은적사 철불 제작

▲ 은적사 철불은 지방호족세력들이 득세했던 고려초에 제작됐습니다. 호족세력들이 제작한 불상이어서인지 미소자체가 굉장히 인간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속화되지 않는 부처의 미소입니다.

 불교경전 화엄경에 금강산은 바다 가운데에 떠 있는 산이라고 합니다. 해남의 금강산도 산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여 금강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습니다. 더욱이 은적사의 철볼은 화엄경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입니다. 금강산이라는 산 이름과 어울리는 부처입니다. 
또 당시 당나라에서 선종을 들여온 선승들 대부분이 화엄종 계열이었고 따라서 이들이 개창한 사찰엔 철로 된 비로자나불이 제작됩니다. 
비로자나불은 인간과 부처가 하나 듯 모든 만물은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부처입니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은 그 자체가 진리인 법신불입니다. 지방호족들은 법신불을 통해 임금과 신하가 따로가 아닌 누구나 왕이 될 수 있음을 설파합니다. 
한마디로 비로자나불은 호족세력들이 지향하는 사상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은적사 철불은 조각기법이 뛰어나 동그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의 사실적인 얼굴 표정입니다. 
철은 힘의 상징이자 무의 상징입니다. 차가운 느낌의 철은 지방호족세력들의 이미지와도 어울리지요. 따라서 이 시기 제작된 철불은 통일신라 불상들이 갖는 균형과 예술성보단 무뚝뚝하고 크기도 큽니다. 대표적인 것이 남원 실상사 철불과 장흥 보림사 철불입니다. 
그런데 은적사 철불은 크지도 않고 조각성도 우수합니다. 머리와 어깨, 몸과 다리의 통일적인 균형미, 특히 은은한 미소가 돋보입니다. 달갈형 얼굴에 웃고 있는 긴 눈, 턱 밑의 줄 하나가 표정을 더욱 풍부하게 합니다. 이렇듯 풍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철불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해남의 지리적 특성과 연계해 볼 수 있습니다.

너무도 인자한 미소의 탄생

▲ 장흥 보림사 철불은 우리나라 철불 중 가장 오래된 철불입니다. 은적사 철불의 옷 모양은 이 불상과 닮았습니다. 그러나 보림사 철불의 얼굴 표정은 근엄합니다.

 해남은 고대부터 해상무역을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곳입니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선진문물은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전파됐지요. 해상무역과 군사 및 대외교류의 요충지였던 지리적 특징 때문에 은적사 철불 같은 우수한 작품이 제작됐을 것입니다.
은적사 철불은 옷의 형태와 두 팔에 걸쳐진 옷 주름 등이 통일신라 말인 858년에 만들어진 장흥 보림사 철불과 닮았습니다. 장흥 보림사 철불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철불 중 가장 일찍 제작된 것이며 지방호족세력들이 만든 불상입니다.
해남의 호족세력은 장흥 보림사 철불과 닮은 불상을 제작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철불의 모양을 따르되 얼굴 표정만큼은 신성한 신의 얼굴과 남도 사람들의 넉넉한 표정 그 중간을 선택합니다. 
남해바다로 진출한 영웅호걸의 틈바구니에서 경쟁도 하고 보호도 받으면서 중앙으로의 진출을 꿈꿨을 해남호족은 자신과 닮은 부처, 그러면서도 덜 세속화된 부처의 모습을 제작합니다. 
지방에 살면서도 중앙을 꿈꿨던 자신의 꿈을 표현한 것입니다. 
은적사 철불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광주 증심사 철불은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더 인간화됩니다. 지방호족들이 만든 불상이라 근엄한 귀족적인 신보단 민초를 닮은 신의 모습을 추구한 것이겠지요.

해남 유일의 철불

▲ 광주 증심사 철불은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근엄한 부처가 아닌 민초를 닮은 이곳 철불의 손모양은 은적사 철불과 같이 반대 방향입니다.

 은적사 철불은 손 모양이 특이합니다.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지권인(智拳印)인데 손 방향이 반대입니다. 지권인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라는 의미로 오른손이 왼손의 검지를 쥐고 있는데 은적사 철불은 왼손이 오른손의 검지를 쥐고 있습니다. 
이러한 손 모양은 증심사 철불에서도, 구례 대전리 석조 비로자나불에서도 나타납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잠깐이지만 이러한 손 모양이 유행했나 봅니다. 통일신라 말 선보이기 시작한 철불은 고려 초까지 이어지다 점차 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철불은 73기 정도이고 이중 광주전남에는 광주 증심사와 장흥 보림사, 은적사가 유일합니다. 또 은적사 철불은 해남에 전하는 다양한 불상 중 가장 오래된 불상입니다.    
은적사 철불과 관련된 설화도 전합니다. 마산면 포구인 공세포에 어느 날 불상 하나가 나타납니다. 귀한 부처님을 본 사람들은 서로 모셔가려 하는데 불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은적사 스님이 우리 절에 모시겠다고 하자 끔쩍 않던 불상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은적사는 처음 약사전에 철불을 모셔오다가 2002년 비로전을 조성하고 그곳에 철불을 안치해 모시고 있습니다.                             

 

박영자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