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국제해상도시 송지 군곡리 / 구운 그릇 사용 등 선진문명도시였다

마한의 마지막 제국 송지 군곡리 발굴현장 

▲ 송지면 군곡리 패총지 제4차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곳에서 수백 개에 이르는 고대 집터들이 발굴돼 고대 국제해상도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가마를 사용해 토기를 구웠고 최초 시루를 제작해 사용했던 세력, 옥구슬과 수정 등으로 몸을 치장하며 최고의 문명사회를 이룩한 제국이 해남에 존재했다.
송지면 군곡리 패총지 제4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곳에서 기원전 1세기경의 가마터와 시루 등이 발굴됐다.
가마의 사용은 한 사회를 문명사회로 이끌었다. 그릇 제작의 다양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이는 식생활의 변화도 불러왔다. 또 이곳에서는 수백 개의 집터가 존재하고 있음도 드러났다. 단순 촌락구조가 아닌 거대도시가 이곳에 존재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700~800년 동안 존속했다.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이르는 선진적인 문명사회가 왜 송지면 군곡리에 존재했을까.  

▲ 군곡리에서 가마에서 구운 다양한 토기편이 발굴되고 있다.

드러난 놀라운 사실

 1983년 목포대학교에 제보가 들어왔다. 송지면 군곡리에 커다란 패총지(조개껍질 무덤)가 존재하고 있다는 제보였다. 제보자는 황도훈 전 문화원장이었다. 1986~1987년 국립광주박물관과 목포대학교박물관이, 1988년에는 목포대 단독으로 발굴조사가 연이어 진행됐다.
그리고 드러난 놀라운 사실, 2000년 전에 이곳에 거대한 해상도시가 존재했던 것이다. 
중국과 가야, 일본과 활발한 교류활동을 통해 선진문명을 향유하고 부를 축적했던 고대 국가, 경남 남해 사천 늑도와 함께 우리나라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곳, 군곡리 패총의 발굴로 당시 고대인들이 어떤 루트를 통해 국제 해상무역을 전개했는지도 밝혀졌다.

중국 대방군 군곡리에 오다

 유방이 세운 중국 한나라의 7대 황제 무제, 진시황과 청나라의 강희제와 함께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무제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중국 요동지역에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을 설치했다.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로 한반도와 주변국의 정세는 요동을 친다. 이는 시대의 변화를 예고하는 한편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고 공존하는 새로운 정세를 만들어 냈다.
송지면 군곡리 인근 백포만은 중국과 한반도-일본을 연결하는 항로에 위치해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속이 빠른 울돌목을 거치기 위해 숨 한번 돌려야 할 중간 기항지이고 영산강을 통해 육지와의 문물교류도 용이했다. 
 한나라 무제가 세웠던 한사군 중 대방군이 먼저 이 루트를 활용해 국제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중국 대방군의 해상무역인과 일본 해상무역인들 간의 무역이 활발해질수록 군곡리는 중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이유는 이들 해상세력들이 반드시 거처가야 할 곳이 군곡리 인근 백포만 항구였기 때문이다.

▲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송지 군곡리 토기들.

우리나라 최초 가마터

 먼저 기원전 1세기경에 중국의 토기 기술이 군곡리로 전해졌다. 중국 한나라의 토기 제작기술은 군곡리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물레가 등장하고 토기에 무늬를 넣고 고온으로 토기를 굽는 가마를 사용했다. 가마의 도입으로 토기를 제작하는 시간이 단축되고 다종다양한 형태의 토기들이 만들어졌다. 한 번에 수십 점의 토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혁신은 이후 한국 도자기 제작기술로 이어졌다.  

중국 동전과 복골 유입 

 유방이 세웠던 중국의 한나라는 14대 황제인 평제에 이르러 휘청거리게 된다. 외척 왕망이 평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해 신(新, 8년~23년)나라를 건립한 것이다. 물론 신나라는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다시 후한이 들어서지만 신나라 때 만든 동전인 화천이 군곡리에서 발견됐다. 화천은 경남 사천과 김해, 제주, 일본 대마도, 규슈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당시의 해상무역루트를 알게 해 주는 중요 유물인 셈이다.
군곡리에서는 동물 뼈로 점을 쳤던 복골도 다량 발견됐다. 복골은 중국에서 신석기시대 성행했던 의례행위인데 철기시대에 이르러 해로를 통해 군곡리로 유입돼온 것이다.
또 중국의 철기도 유입돼 사냥과 어업 및 농업도구로 제작해 사용됐다.  

산엔 사슴, 바다엔 굴 풍부

 군곡리 해상도시는 풍부한 먹거리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다. 산에는 사슴과 멧돼지가 넘쳐났고 바다는 각종 패류와 물고기가 넘쳤다. 이들은 수렵활동으로 사슴과 멧돼지를 잡아먹었고 소와 개는 농경이나 생활에 이용할 목적으로 사육했다. 군곡리 발굴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물 뼈가 사슴에 이어 멧돼지 뼈라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중개무역으로 얻은 이익과 자연이 주는 풍부한 먹거리로 인구는 갈수록 늘어났다.
 특히 기원 후 2~3세기 한반도에 갑자기 찾아온 기후의 한랭화로 농작물이 크게 피해를 입었지만 해양자원이 발달한 군곡리 일대는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어로활동을 통해 바닷가에 널려진 굴과 꼬막을 주로 먹었다. 또 먼 바다로 나가 물퉁돔과 참돔, 상어, 황새치 등의 어종을 잡았다. 외양성 어업까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먹거리로 인해 이들은 굴을 까는 조새와 낚시 바늘, 그물, 어망추, 찌르게 등 다양한 어구와 사냥에 필요한 도구를 발달시켰다.
 군곡리 해상세력들은 풍부한 경제력으로 멋도 부렸다. 조개를 정교하게 가공한 팔찌와 수정 및 옥구슬로 치장하고 사슴뿔로 정교하게 만든 머리빗을 사용했다.
철로 다양한 도구를 만들고 다양하고 정교한 그릇을 만들었던 기술이 멋진 장신구를 직접 만든 기술로 이어진 것이다. 

중국에 사신 파견

 유방에 의해 중국의 한나라가 탄생하고 다시 신나라, 그리고 후한과 소설 삼국지의 무대가 된 삼국시대를 거처 진나라까지, 중국의 왕조가 숱하게 변하는 동안에도 군곡리 해상도시는 변함없이 번성했다. 
중국 사서인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동이마한 신미제국(東夷馬韓 新彌諸國)이 282년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 수가 29여 국이었다. 먼 오랑캐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소설 삼국지의 무대인 촉나라와 오나라, 위나라 중 가장 강성했던 나라는 조조의 위나라였다. 그러나 조조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조조가 죽은 후 그의 신하였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막고 촉나라를 멸망시킨다. 또 그의 손자 사마염은 손권의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한다.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위나라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고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마한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신미제국이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신미제국의 사신 파견을 ‘매년 풍년이 들고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고 기록할 만큼 진나라는 신미제국의 사신파견을 외교적 성과로 받아들였다. 

▲ 광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군곡리 조개팔찌와 뼈 도구들

마한의 마지막 제국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등장하는 신미제국은 29개 소국을 통솔한 마한의 마지막 제국으로 해남에 위치했다. 
그동안 신미제국의 위치에 대해 대형 고분군이 분포된 나주 반남과 영암 시종 일대라는 의견이 컸지만 최근 들어 해남에 위치했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그 위치가 군곡리였다는 설과 함께 읍 남송리 옥녀봉토성이라는 설이 갈리고 있다.
만약 군곡리가 신미제국이 건설한 해상도시라면 현재 4차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군곡리 패총지는 마한의 마지막 제국 터가 되는 셈이다.
 송지 군곡리 해상도시는 5세기까지 존속하지만 4세기 이후부터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5세기에 이르러선 삼산과 옥천, 북일지역의 해상세력들이 득세한다. 
5세기 해남에서 발굴되는 고분군과 유물들은 대부분의 일본계통이 주다. 5세기 들어 마한시대 유물이 사라지고 일본계통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마한의 멸망과 함께 해남지역에 커다란 정치변동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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