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엎드려라 절을 하자” 
전율마저 일으킨 유적발견

학계 뒤흔든 해남
고댁유적
어떻게 발견 됐나   

▲ 길이만 77미터의 거대한 무덤,, 한국 고고학계는 물론 일본학계를 들끓게 했던 북일면 방산리 전방후원분은 일본 계통의 무덤이어서 발견된 후 1년여 간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아직까지 발굴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주 무령왕릉 발굴은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가 삽 끝으로 작은 돌을 하나 들춰내면서 시작됐다. 태안앞바다의 고려청자 보물선 발견은 2007년 주꾸미가 붙잡고 올라온 작은 청자 때문이었다. 
수천 년 동안 꽁꽁 숨어 있었던 유물과 유적은 그 시간만큼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기에 발견되는 순간의 희열은 엄청나다. 
“엎드려라 절을 하자. 아아 제상이라도 차리고 싶구나” 
해남에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발견됐을 때 故황도훈 문화원장이 내지른 탄성이다.
1984년, 북일면소재지에서 내동으로 이어지는 도로확장공사가 한창일 때 공사로 파괴된 석실분이 드러났다. 이때 황도훈 원장은 파편 수습 차 현장에 있었고 많은 고분군이 주변에 있을 것이란 예감이 자꾸 들었다. 이에 황 원장은 북일면 용운리에 사는 이금연(당시 19세)군에게 지나가는 말로 말무덤, 말매등으로 불리는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통상 주민들은 들녘 가운데 둥그런 고분을 두고 말무덤, 말대등으로 지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군은 말매등, 쌍분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며 자신있게 답했다. 북일면 방산리에 위치한 전방후원분, 한국을 비롯한 일본학계까지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장구모양인 저게 뭘까
북일 방산 전방후원분
 

▲ 일본계통 무덤인 용두리 전방후원분

황 원장은 소나무 등이 무성히 자란 장구모양의 야산이 인공적으로 축조한 시설이라는 것을 한 눈에 간파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집에 있던 자료를 뒤져보니 일본의 전방후원분 사진이 실린 기사를 보게 됐고 그 즉시 목포대 최성락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 교수와 함께 다시 찾은 현장, 최 교수도 흥분했다. 그리고 당시 전방후원분의 권위자인 강인구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이후 들려온 이야기, 원로학자들의 아직은 덮어둘 때라는 답변이었다.
일본계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이 해남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역으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방산리 전방후원분은 1년여 간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1985년 12월 강인구 교수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길이만 77미터의 거대한 무덤, 일본학계는 들끓었고 반면 국내학계는 강 교수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지 않음만 못하게 된 사정 속에서 1986년 9월, 군청 공보실의 배윤홍씨가 황 원장을 찾아왔다.
군정보고의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예산계 김정섭 계장과 함께 삼산면을 돌던 중 용두리와 창리 사이의 밭 가운데서 전방후원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번엔 틀림없다니까요
삼산 용두고분 발견

배윤홍씨는 지난번에도 옥천 영신리에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분구가 있다고 황 원장을 끌고 가 실망을 안긴 터라 이번에는 혼자서 이틀간 탐문을 하고 주민들 사이에서 말매, 말무덤으로 속칭돼 왔음도 알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즉시 현장을 찾아 나선 황 원장은 그 자리에서 “고맙다. 엎드려 절을 하자”고 말했다. 일본과의 불편한 역사 때문에 해남의 고대역사가 묻히고 있다는 안타까움에 학계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으키고 싶었던 차에 발견된 제2의 전방후원분이라 그 발견이 눈물겨웠던 것이다. 이후 목포대 최성락 교수가 내려오고 강인구 교수에 의해 측량이 실시된 후 삼산면 용두리 전방후원분도 세상에 공개됐다.
용두리 고분은 발견된 지 20년이 지난 2008년 10월에야 광주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발굴조사 결과 3차례 도굴됐음이 확인됐고 도굴 시기는 일제강점기까지 소급됐다. 
3차례 도굴로 출토된 유물은 가야계 토기류와 철기류 파편, 옥으로 만든 유물들이 소량 발견됐고 조성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됐다.
같은 시기에 조성된 북일 방산리 전방후원분은 광주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만 실시됐는데 조사결과 도굴이 여러 차례 진행돼 소량의 파편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두 곳 모두 중국과 일본, 가야와 해상교류를 했던 국제해상세력의 무덤이었다.

동네야산에 확성기 달다
발견된 현산면 조산고분
 

 

▲ 2004년 군산 앞바다서 인양된 산이 진산리 자기.

1973년 현산면 증산마을에 마을방송이 들어왔다. 이에 주민들은 마을 가운데 있는 둥그런 야산에 확성기를 설치하고자 제토작업을 벌이던 중 발 밑의 땅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헉, 땅 속이 뻥 뚫려 있음을 발견했다.
전남지역에서 처음으로 도굴되지 않은 고분군의 발견, 198점의 완벽한 부장품들이 쏟아진 월송리 조산고분은 그렇게 드러났다. 조산 고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실측은 1982년에 이뤄졌다. 발견 당시로부터 10년이 흐른 후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지만 다행히도 그때까지 분구와 무덤 안은 온전히 남아있었고 198점에 달하는 방대한 유물이 출토됐다.
마을사람들은 이 무덤을 조산, 외도리 동산으로 불렀다. 그런데 발굴된 방대한 유물로 인해 공주 무령왕릉에 버금가는 학술자료를 제공한 고분임이 밝혀졌다. 
유물은 토기, 마구류, 무기류 장신구류 등 다양했고 무덤 규모도 클 뿐 아니라 백제식 석실분과도 달랐다. 5~6세기에 축조된 왜식이 짙은 무덤이었다. 이 세력도 바닷길을 이용해 무역활동을 했던 국제해상세력이었다.

송지 군곡리 패총지 발굴
목포대박물관 위상 키워

▲ 현산 조산 고분 출토유물

1983년 초에 송지면 군곡리 패총지가 발견됐다. 해남 곳곳을 누비며 고대유적지를 찾아 나선 황도훈 원장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2만여 평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에 분포된 조개껍질과 숱하게 널린 토기 파편들, 촉이 섰다. 즉시 목포대 최성락 교수에게 연락을 했다. 현장으로 달려온 최성락 교수, 전율이 일었다, 김해 회현리 패총과 남해 사천 늑도 패총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가 최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 교수의 진두지휘로 지표 조사가 실시되고 1986~1988년 세 차례 걸쳐 발굴이 이뤄졌다. 
그리고 밝혀진 놀라운 사실, 군곡리 패총지는 마한의 마지막 제국이 세운 국제해상도시였다. 고고학계는 흥분했다.
옛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쌓여 형성된 패총지에는 집터와 토기 가마, 장신구, 불에 탄 낟알 등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됐다. 
이 유적의 조성 연대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까지, 700년 간의 시간이 패총 속에 압축돼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전남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를 규명할 유적이 없었는데 군곡리 패총 발굴로 그 공백이 메워졌다. 
군곡리에서는 중국의 의례행위인 복골(卜骨)과 중국 신(新)나라 때의 화폐인 화천(貨泉)도 출토됐다. 
이를 통해 기원전 1세기경에 이미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로(海路)가 형성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군곡리 패총지는 현재 제4차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마한의 마지막 제국인 신미제국이 세운 도시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나오고 있다. 또한 군곡리 패총지 발굴로 마한의 중심 국가가 영산강 주변의 나주와 영암이 아닌 해남에 있었다는 설이 정설이 됐다.
우리나라 고고학의 대부인 최성락 교수는 이후 군곡리에 빠져버렸다. 최 교수가 목포대를 떠나지 못한 것도, 연구학문을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바꾼 것도 군곡리와의 연인 때문이었다. 
목포대박물관은 군곡리 발굴을 통해 야외조사 장비 일체를 갖추게 되면서 박물관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됐다. 또 일본 나고야(名古屋) 대학의 군곡리 현장 방문을 계기로 양 대학의 학술교류가 이뤄지고 목포대 학생들의 나고야 대학 유학길도 열리게 됐다. 

호기심이 일으킨 발견으로 
고대사 연구 차곡차곡 

해남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분과 패총의 발굴조사로 해남고대사가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는 가운데 올해 8월 ‘해남반도 마한 고대사회 재조명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 내용을 요약하면 송지면 군곡리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700년 동안 존속한 국제 항구도시였고 마한의 29개 소국을 거느린 신미제국이 세운 도시라는 추정이다. 
그런데 700년 동안 국제항구도시로서 번성을 누렸던 송지면 군곡리 세력은 4세기 이후 세력이 약해진다. 이유는 마한을 침범한 백제가 신미제국의 중심지인 군곡리 세력의 대외교섭권을 박탈하고 이를 대신할 교두보를 현산면 일대에 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의 남하가 시작되자 백제의 해남지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토착세력들의 영향력은 컸다.
이에 백제는 6세기 들어 토착세력이 힘이 덜 미치는 곳인 북일면 일대를 새로운 항구로 개발해 친 백제계인 왜인을 대리인으로 세워 통제케 했다는 것이다. 
방산리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북일 지역에 주로 나타나는 왜계통 무덤에 대한 설명인 셈이다.
또 왜 계통 무덤인 삼산면 용두리 전방후원분과 현산면 조산고분에 대해선 이 두 곳도 백제가 국제무역항으로 왜인을 활용하지만 북일지역과는 차별적인 대우를 했기에 크게 성장하진 못했다는 것이다. 
 
등산객·중학생이 발견
우리나라 최대 가마터

시간이 흘러 해남의 역사는 고려 초에 이르러 다시 위용을 드러낸다. 
1998년 화원면 신덕리 주변 산을 등반하던 한 등산인이 다량으로 흩어진 도자기 파편을 발견, 해남군에 신고한다. 
이로서 10세기경에 조성된 우리나라 초기청자 가마터이자 80~90여기에 이르는 최대 규모의 가마터가 발견된다. 
이후 발굴조사 결과 우리나라 초기청자 가마터 중 온전한 형태의 초기 진흙 가마가 신덕리에서 확인됐고 우리나라 초기청자 발생지라는 설도 유력하게 나오고 있다.  
1983년 한 중학생에 의해 산이면 진산리 가마터가 발견됐다.   
흔히 상감청자하면 강진이 떠오르지만 11세기에 조성된 산이면에서 상감청자 파편이 발굴되면서 산이면이 상감청자 발생지라는 설도 제기됐다. 또 이곳에서 생산된 철화청자는 전국으로 퍼져나갈 정도로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산이면 일대 가마터는 완도 어두리 해안에서 3만점에 이른 철화청자 등이 인양되면서 1985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고 2004년 군산 앞바다서 8100여점의 산이 자기가 인양되면서 또 다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산이면 진산리 일대에는 106기에 이른 가마터가 존재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대 해남은 국제무역항로
고고학은 모두 바다와 관련

화원면에 이어 산이면에 들어선 집단 가마터, 집단 도요지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풍부한 물과 땔감, 질이 좋은 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산된 자기를 운반할 교통로이다.
고대 바닷길에서 해남은 서해와 남해를 L자로 연결하는 요충지였고 당연히 한·중·일 고대문화 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마한시대, 송지면 군곡리에서 시작된 일본과 가야, 중국과의 해상무역이 고려 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해남은 중국과 서해, 남해로 통하는 해상물길과 영산강으로 통하는 육상물길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 뱃길로서는 최고의 요충지에 속했던 것이다.
해남에는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고고학적 유적지가 많다. 그런데 이러한 유적지 모두 우연에 의해 발견됐고 또 우연히도 모두 바닷길을 통해 발전했고 번성한 유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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