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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왜? 세계가 보존할 유산일까] 천년간 두륜산과 어우러진 수행·신앙 공간…인류가 보호할 가치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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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03  15: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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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관련 유일한 사찰, 임금 하사 유물도 가장 많아
초의스님 일지암서 조선의 차 부흥, 대흥사 차의 성지로

   
▲ 대흥사는 1000년 동안 아름다운 주변의 자연과 스님들의 생활공간이자 수행 공간, 신도들의 신앙공간으로 전통문화를 지키고 이어왔다. 이러한 산사문화는 불교권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 사찰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통일신라 말, 그는 자유로운 사고의 선지자였다. 그의 눈에 부처님이 누워있는 와불(臥佛) 형상인 두륜산이 들어왔다. 그 와불을 찾아가는 길, 곳곳에 계곡이 가로막는다. 계곡물을 아홉 번 건너니 와불(臥佛) 아래에 넓은 터가 기다리고 있다.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던 그는 9개의 계곡 위에 9개의 다리를 조성하고 마지막 계곡인 금당천 너머 한적한 곳에 석가모니를 모실 대웅보전을 지었다. 대신 넓은 터 중앙에는 무한의 인간을 상징하는 천불을 모신 천불전을 지었다. 
한국의 사찰은 그리스 로마 건축물처럼 좌우대칭이 엄격했다. 정중앙에 대웅보전을 짓고 대웅보전을 받쳐주는 양편의 건물, 마당에 탑과 석등 등을 규격에 맞게 배치했다. 그러나 대흥사의 가람배치는 엄격함 대신 자연과의 합일을 꾀했고 그 안에 불교의 사상을 응축했다. 
대흥사를 찾은 사부대중은 9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9란 숫자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 다리를 건너 이르는 곳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천불전이다. 인간의 심성에 부처가 자리하고 있다는 천불사상, 나의 얼굴이 새겨진 천불전에서 나를 만난 후 9개의 다리 중 마지막 다리인 금당교 아래 계곡물에서 세속의 때를 씻고 찾아가는 곳이 석가모니가 모셔진 대웅보전이다. 8개의 다리를 건넌 후 나를 만나고 마지막 9번째 다리를 건너서 만나는  석가모니 부처, 그 순간 나도 부처가 된다는 의미를 함축한 것이 대흥사의 가람배치의 진수이다.

1000년의 신앙·수행 공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7개 사찰 중 대흥사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 또 있다. 신앙의 공간에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지어지면서 충(忠)의 공간이 더해진 것이다. 따라서 대흥사는 크게 세 개의 권역으로 나뉜다. 석가모니가 모셔진 대응보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은 신앙의 공간인 부처의 세계,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담긴 천불전 구역은 수행 공간인 인간의 세계, 한국 불교의 특징인 호국불교를 담은 표충사 구역은 충의 세계로 구획돼 있다.  
엄격한 사찰건축 양식을 버리고 자유로움을 취한 대흥사 가람배치는 1000년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이어진 숱한 중창불사도 과거의 질서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더하는 식이었다. 
대흥사는 1000년 동안 아름다운 주변의 자연과 문화유산, 스님들의 생활공간이자 수행 공간, 신도들의 신앙공간이자 해남의 문화 역사공간으로 전통문화를 지키고 이어왔다. 이러한 산사문화는 불교권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 사찰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이러한 대흥사를 비롯한 한국의 7개 사찰이 191개국이 가입된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는 것은 한국을 떠나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가 위태롭도다

세월은 흘러 선지자에 의해 대흥사가 지어진지 600여년 후, 서산대사라는 걸출한 스님이 탄생한다. 
“아, 조국의 운명이 위태롭도다. 조선의 승병들이여! 분연히 일어서시오! 조정대신들은 당쟁 속을 헤매고 군관들은 전선에서 도주하니 이 아니 슬프오? 순안의 법흥사로 집결하시오. 나 휴정은 거기에서 그대들을 기다릴 터이오”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일본에 유린당할 때 서산대사가 각 사찰에 보낸 격문이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73세 노장의 몸으로 승병을 일으켰고 따라서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약한 승군 대부분은 서산대사의 문중이었다. 
전쟁이 끝난 4년 후인 1602년 선조임금은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서산대사에게 정2품인 당상관과 증호를 내리는 교지를 보냈다. 또 의승대장 황금연가사(義僧大將 黃金緣袈裟), 옥으로 만든 발우(玉鉢), 벽옥발(碧玉鉢) 3좌, 당혜(신발) 2쌍, 호박 염주와 단주 등도 함께 하사했다. 

내 의발을 대흥사에 보관하라

   
▲ 대흥사에는 선조임금이 서산대사에게 하사한 유품이 보관돼 있다.

 그 후 2년 뒤인 1604년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의발과 임금이 내린 유품을 대흥사에 보관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제를 지낼 것을 밝힌다. 
부국강병을 꿈꾼 정조대왕에 이르러서 대흥사는 호국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정조대왕은 서산대사를 선양한 화상당명 병풍을 대흥사에 하사하고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를 대흥사에 짓게 한다. 
또 직접 쓴 표충사 사액현판을 내리고 예조정랑과 각 고을 군수 및 현감으로 하여금 제향을 거행케 한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 정조대왕이 국가차원의 서산대제를 거행케 한 것은 나라가 부강하기 위해선 호국의 이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정조는 서산대사의 제를 위해 제의 순서와 음식 진설 등이 적힌 글도 직접 써 대흥사에 보낸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정조는 대흥사에 유교식 사당 ‘표충사(表忠祠)’를, 북한 묘향산 보현사에는 수충사(酬忠祠)를 짓게 하고 왕명으로 봄과 가을에 국가제향을 정례적으로 봉행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대흥사는 북한의 보현사를 제외하고 서산대사 관련 유일한 사찰이자 임금과 관련된 가장 많은 유물이 보관된 사찰로 기록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국가제향으로 봉행됐던 서산대제는 중단됐고 현재에 이르러 서산은 역사교과서에서도 찾기 힘든 잊혀진 인물이 되고 있다.

서산대제 남북합동 제향 추진

   
▲ 대흥사는 조선시대 국가제향으로 거행됐던 서산대제를 복원해 잇고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갈 때에는, 모름지기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시를 남겼던 인물, 조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았던 서산대사와의 인연으로 대흥사는 조선불교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된다. 
이에 전 주지였던 범각스님의 노력으로 대흥사 소장품 중 서산대사 제향을 국가적으로 치렀다는 것을 입증하는 정조대왕의 ‘사액시제문(賜額時祭文)’이 발견되고 2008년 ‘호국 대성사 서산대제’를 200년 만에 재현해 냈다. 이때부터 시작된 서산대제 국가제향 재현은 매년 이어졌고 현 월우 주지스님에 의해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다.
이어 대흥사는 서산대제 추계대행을 북한의 묘향산 보현사에서 남북합동제향으로 봉행할 계획을 하고 있다. 
대흥사는 2013년부터 서산대사 추계제향을 추진해왔고 2014년에는 북한 묘향산 보현사에서 남북합동으로 봉행하기로 합의도 했다. 그러나 남북합동 추계제향은 남북관계 악화로 무산됐다.

다성 초의, 일지암에 오다

   
▲ 대흥사에선 초의스님의 차 사상을 공유하기 위한 전남 선차문화 국제교류회를 열었다.

 또 세월은 흘러 18세기 초의스님이라는 걸출한 스님이 대흥사 일지암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초의는 이곳에서 「동다송」을 저술, 우리 차의 부흥을 이끈다. 당시 일지암은 유명한 석학들이 오가는 장소였고. 모두 초의 차 사상에 매료된다. 한마디로 초의가 살았던 시절, 대흥사 일지암은 불교와 유교가 서로 교류하는 장이자 차를 통해 학문과 예술도 꽃을 피운다. 
소치 허유가 진도 운림산방에 우리나라 남종화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초의선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소치의 재능을 알아본 초의는 녹우당의 서화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추사에게 소치를 소개했던 것이다.  
또 시서화와 유학 등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초의는 다산 정약용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고 이조참판을 지냈고 조선건국이래 시를 가장 잘 지었다는 신위, 다산의 아들 정학연․정학유 형제, 명문집안 출신이었던 홍현주 등 그는 당대 석학거장들과 교류했다. 
추사 김정희와는 40여 년 동안 깊은 인연을 맺었다.
숭유억불 정책임에도 유학자들이 초의선사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의 열린 사고, 다도에서 터득한 깊은 성찰의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초의는 차를 마시면서 내가 옳으면 남도 옳을 수 있다는 다양성과 인간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은 자연스럽게 왔다 자연스럽게 가니 삶에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의 사상을 설파했다.
초의선사에 의해 해남은 차의 성지로, 일지암은 인문학의 성지로 자리매김된다.
이러한 초의의 차 사상을 공유하고 우리 차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월우 주지스님은 올해 처음 ‘2018 전남 선차문화 국제교류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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