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 숙식과 아지트 제공하며 지원
북평 성도암·대흥사 심적암 이때 전소

▲ 대흥사 심적암은 한말 마지막 의병투쟁으로 완전 전소됐다. 대흥사 입구 놀이터에는 심적암 의병을 기리는 탑이 서 있다.

 해남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근거지는 대흥사 심적암과 북평 성도암, 미황사였다. 목포시의 항일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해남 항일운동 아지트는 사찰이었다.
대흥사와 북평 성도암, 미황사가 항일운동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이유는 두륜산과 달마산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항일운동은 게릴라 전투 또는 비밀조직에 의해 운영됐고 이러한 전투방식은 산을 끼고 있었을 때 은신과 퇴로에 유리했다. 
해남의 3곳 사찰이 항일운동 근거지가 된 것은 1907년 조선군대의 해산으로 일어난 한말 마지막 의병투쟁부터이다. 
1909년 접어들어 조선의 의병활동은 일본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거의 시들어 가는 반면 호남 의병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에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호남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가고 이로 인해 호남의 의병들의 활동근거지는 해남과 완도 등 남해안 일대로 국한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의병들의 근거지가 중국 동북아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해남군과 강진, 영암, 완도, 진도 등은 의병활동의 무대가 되고 그 중 마지막 의병투쟁지가 대흥사 심적암이다. 

성도암, 한말 의병투쟁지

 당시 해남과 완도에서 활동한 의병의 규모는 해남과 영암에서 주로 활동했던 추기엽(담양 출신, 완도로 유배)의 부하가 450여명, 이덕삼 200여명, 황두일(북평 이진출신) 120여명, 황준성(전북 진안출신, 완도로 유배) 150여명, 강성택 20여명 등 940여명에 이른다. 
이중 두륜산과 달마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던 의병들의 주요 아지트는 두륜산 투구봉 아래였다.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많아 숨기에도 좋았고 전투 시 엄호에도 유리해 의병들의 거점지로 이용됐다. 특히 이곳은 인근에 성도암이 있어 식량조달이 용이했고 투구봉과 성도암 산봉우리에서는 왜군의 움직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투구봉과 성도암에서 전투가 있을 때에는 콩 볶는 소리처럼 총소리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이불 속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투구봉 인근 바위틈에 거주했던 의병들에게 식사를 가져다 준 이들도 성도암 스님이었다. 스님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의병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날려다 주었는데 이때는 서로 간 암호를 통해 신분을 확인했다. 의병들의 은둔지요, 식량 제공 처였던 성도암은 이 같은 인연으로 일본군에 의해 건물 8채 중 6채가 전소되는 아픔을 맞게 된다. 성도암 인근 두륜산에서 주로 산악 게릴라전을 벌이던 이때 의병들은 일본군과 숱한 전투를 벌이며 그 수가 급속히 줄어든다. 

미황사, 비밀아지트 역할

 이때 의병들은 각기 분산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의병수가 급격히 줄자 하나의 연합부대를 만들어 황준성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다. 황준성은 조선군대의 해산에 불복해 완도로 유배당한 군인이었다.
완도 유배지에서 어린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황준성은 1909년 6월 유배지를 탈출해 완도 의병 강성택과 합세해 완도 고금도와 청산, 해남 화산면 등 각 섬을 돌며 의병활동을 펼쳤다. 
이때 해남에서는 황두일과 추기엽 등이 북평면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각각의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군인출신인 황준성 대장을 중심으로 연합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통일된 의병부대는 성도암 전투에서 왜군에 밀려 미황사에서 재집결을 한다. 이때 의병수는 60~70으로 줄어들었다.
미황사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의병들은 산악 게릴라전을 벌이기 위해 1909년 음력 7월8일 대흥사 심적암에 당도한다. 그러나 의병들의 이동노선이 발각되면서 다음날 새벽 4시 일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다. 
대흥사 심적암 전투에 대해 일본경찰문서 전남 폭도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09년 음력 7월8일 밤, 해남수비대장 오시하라 대위 이하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이 적도 토벌을 목적으로 대흥사로 출동했다. 1909년 7월9일 오전 4시 절을 포위 공격했는데 적도는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전멸했다. 적 22명을 죽이고 8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승총 47점, 군도 5점을 노획했다. 9월18일 수괴 황두일의 부하 21명, 19일 4명이 해남 수비대에 투항했다'라고 적고 있다. 심적암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은 다시 모여 소규모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결국 해산되는 운명을 맡게 된다.
이때 심적암 스님들도 죽임을 당하고 투항한 의병들도 교수형을 당한다. 또 대흥사 심적암은 이때 완전 전소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심적암, 완전 전소되다

 한말 호남의병들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일제강점기 기간 해남에선 기미 3·1운동에 이어 1930년대 호남 최대 항일조직이었던 전남운동협의회가 결성된다. 이때 활동 근거지도 대흥사 심적암과 성도암, 미황사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북평 이진이 중심이 돼 전남 9개 군에 걸쳐 조직된 항일운동조직이었다. 이진 출신인 김홍배가 중심이 돼 결성된 이 조직의 결성과 회합도 모두 이들 사찰에서 이뤄졌다.  
1932년 전남운동 협의회는 일제에 의해 발각돼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지만 당시 조선일보에서 호외까지 발간할 정도로 조직의 규모가 방대했고 체포된 핵심멤버만도 558명에 이를 정도로 일본을 서늘하게 했던 사건이다.
관련자를 검거하는 데만 6개월, 조직원 중에 현직 경찰에 몸담은 이가 있는가 하며 일제강점기 때 관변조직이었던 농촌진흥회 소속인사와 면장과 면서기, 동장 등 다수의 공직자도 혐의자로 검거됐다. 조직이 워낙 치밀해 경찰은 물적 증거를 잡는데도 애를 먹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과 완도에서 출발했지만 최종 목표는 전국적인 항일조직체의 건설이었다.
김홍배를 중심으로 한 전남운동협의회가 아지트로 성도암과 대흥사 심적암, 미황사를 이용한 것은 스님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적발 시 산으로 피신할 수 있는 이점 때문이었다.  
특히 북평 성도암은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어 해방 후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산면 월송 출신인 신동기이다.   
1930년대 전남운동협의회 관련자이자 해남 마지막 빨치산이었던 신동기는 해방 후 화원면을 제외한 해남 전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추수봉기 때 친일경찰 재기용과 미군정의 강제 미곡 착출에 반대하며 항거를 주도했다. 추수봉기 후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신동기는 달마산을 무대로 7년 가까이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은신처는 북평 성도암 대웅전 뒤 용굴이었다.    
1953년 같이 활동했던 빨치산 대원이 경찰에 잡히면서 신동기의 은신처는 발각되고 신동기는 경찰이 뒤에서 쏜 총에 맞아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가 생포된다. 그리고 해남읍 장날 고도리 들판에서 장꾼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된다. 
한편 대흥사 심적암은 기미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발굴조사가 진행된다. 또 대흥사 입구 놀이터에 심적암 기적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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