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성칠, 한말 마지막 의병으로 활동
이라임씨,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의병 자녀

▲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의병자녀인 이라임씨는 마당에 놓여 있는 나무토막이 아버지가 지니고 다닌 엽총 같아 소중히 여긴다고 말했다.

 “대흥사 심적암에서 회의를 마치고 막 잠이 들었는데, 일본 헌병들이 삥 둘러서 총을 쏴서 의병 거의 다가 죽었대요. 아버지랑 몇 사람만이 높은 담을 뛰어넘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 후 누가 밀고를 할까 완도 고마도로 피신해 짚신을 팔아 3년 살다 고향인 북일면(당시는 북평면) 용일리에서 서당 훈장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보내다 돌아가셨어요” 
1909년 한말 마지막 의병투쟁 장소였던 심적암 전투에 참여한 이성칠 의병의 딸인 이라임(95·현산면 신방리)씨는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의병자녀이다.
아버지 이성칠은 30대 초반 결혼을 하자마자 독립운동을 한다고 산으로 들어갔다. 당시 이성칠은 북평면의 뜻있는 이들과 함께 이진 출신 황두일 의병장 밑에서 활동했다. 당시 의병들은 대부분 화승총 같은 구식 무기를 갖고 있었는데, 이성칠은 엽총을 갖고 있어 일본 군인들을 많이 죽였다고 한다. 
이라임씨는 생존의 아버지를 회상하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이라임씨는 마당에 놓여 있는 나무토막을 무척 소중히 여긴다. “이게 총 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총같이 생긴 나무토막이 아버지가 지니고 다닌 엽총같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칠은 고종16년(1871) 3월6일 북일면 용일리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영민하고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지조가 있어 향리에서 추앙받았다고 한다. 
그는 조선군이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하자 외당숙인 임여안과 함께 이진출신인 황두일 의병장 부대에 가담해 해남, 완도, 강진, 영암 등지에서 활동했다. 영암 삼호 헌병대를 습격해 총을 노획하는 등 수 차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09년 7월9일 새벽 4시 경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본 헌병의 급습을 받아 많은 동료 의병들이 죽임을 당하지만 그는 구사일생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외당숙 임여안은 이때 사망했다. 이후 의병을 재결성하려 했지만 밀고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완도 고마도로 피신을 하게 됐다. 그 때 쓰던 총을 북평면 동해리 양흔승의 집 지붕에 숨겨놓았는데, 70년대 새마을 사업 때 이 총을 발견한 주민들이 깜짝 놀라 남창지서에 신고했다고 한다. 이성칠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했다. 그의 의병활동이 기록된 자료가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