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면 방춘출신
인민위원회 때 선출직 군수

▲ 김정수, 그는 해방 전후에 활동했던 해남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로인해 한때 계곡 방춘리는 해남의 모스크바라 불리었고 6ㆍ25전쟁 때 경찰에 의해 마을이 전부 전소되는 피해도 입었다.(계곡 방춘서원 전경)

 해남 초대 군수를 지냈던 인물, 그러나 해남군 역대 군수 명단엔 그의 이름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해남 초대군수이자 평양시장으로 기억한다. 
계곡 방춘리의 대부호 아들이었던 김정수는 해남 대부분 항일운동가들처럼 일본 유학파였다. 그는 와세다 제일고등학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서울로 밀송, 살포하다 6개월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 
출옥 후 그는 전남 목포로 내려가 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1933년 산하기관으로 목포노동조합을, 이듬해 1934년 1월에 목포적색노동조합 결성준비위원회를 새롭게 조직하고 학생운동까지 망라한다. 
또 해남에 농민조직을 만들기 위해 산이면 출신 박한배와 만남을 갖고 야학회와 농민계, 소비조합 등을 통해 농민조직과 노동조직 결성을 시도했다. 
김정수는 무안군의 도서지방까지 진출해 어업조합을 조직하는 등 그의 활동영역은 목포를 중심으로 인근 해남과 영암, 강진, 완도, 장흥 등지에 걸쳐 있었으며 운동영역은 노동자와 농민, 어민, 학생, 청년, 여성 등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김정수는 각종 회사를 운영해 활동자금을 자체 마련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만 1934년 2월부터 시작된 해남의 전남운동협의회 검거선풍이 전남일대로 확대되면서 그의 조직도 발각된다.
전남운동협의회는 북평면 이진을 중심으로 결성된 1930년대 호남 최대 항일운동 조직체였다. 
북평 이진 출신인 김홍배의 주도로 결성된 전남운동협의회가 전남 11개 군에 걸쳐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던 시기, 계곡 방춘 출신 김정수는 목포를 중심으로 6개 시․군 이상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정수는 이 사건으로 1934년 광주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김정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은 비합법적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이때까지도 김정수란 이름은 지역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 해남에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가 부위원장 직을 맡으면서 그의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운형을 중심으로 전국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해남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전환하고 김정수를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김정수가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던 시절 인민위원회는 행정과 경찰, 운송업, 학교, 김양식업 등 해남군의 모든 행정을 이끌었다. 이어 김정수는 초대 민선군수로 선출되지만 1945년 11월23일 미45중대가 해남에 들어오면서 3개월간의 극히 짧은 주민자치는 막을 내려야 했다. 
미군정은 처음 인민위원회 실체를 인정하고 김정수를 군수로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얼마 후 미군정은 친일경찰을 대거 기용해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들은 일제 강점기 때 자신을 탄압했던 친일경찰로부터 다시 탄압받는 처지가 되고 만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지하로 잠복한 인사들은 1946년 11월11일 해남추수봉기를 일으킨다. 화원면을 제외한 전 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추수봉기는 친일파 척결과 미군정의 강제 미곡공출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추수봉기를 주도한 김정수는 곧이어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고 평양시장을 지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김정수 집은 계곡 방춘리에서 둔주포까지 그의 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못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 
일제강점기 말,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대부분 인물들이 대지주의 아들이자 일본 유학파인 인텔리였던 것처럼 김정수도 일본유학생이자 대부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계곡 방춘리에는 김정수 외에 천석꾼 아들이자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인 김창수도 있었다. 김창수는 해남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전환할 때 이를 주도했고 인민군이 해남에 들어왔을 때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인물이었다. 
일본에 유학했던 수재들이자 뛰어난 웅변가였고 사회주의 항일 운동가였던 이들의 활동으로 방춘리는 수복 후 경찰에 의해 마을이 전소되고 일가족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해남 초대민선군수였던 김정수, 그러나 좌우익 갈등이라는 민족적 아픔 앞에 인민위원회 시절 얻었던 그의 군수 직함은 합법성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 드신 어르신들 기억 속엔 그는 언제나 초대 민선군수로 각인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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