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운동협의회 결성
1930년대 가장 큰 항일조직

▲ 이진성이 자리한 북평면 이진은 한말 마지막 의병장에서부터 1930년대 호남최대 항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한 김홍배를 탄생시킨 마을이다.(이진성 전경)

 1933년 12월 말, 강진군 군동면 어느 고급 술집, 12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망년회를 즐기고 있을 때 옆방에선 강진의 유지들과 고등계 형사 윤금죽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유지들과 함께 있던 아가씨가 자꾸만 군동면 청년들이 있는 방을 드나들자 술에 취한 형사 윤금죽이 화가 나 아가씨에게 수갑을 채우려 했다. 이것을 본 청년들이 달려들어 싸움이 일어났고 청년들에게 맞은 윤금죽이 사건을 조작해 상부에 보고한다. 
아무래도 비밀조직이 있는 것 같다고. 사건은 도검찰부로 넘어가고 지독하기로 소문난 특별고등계 형사들이 사건을 담당한다.
사소하게 일어난 사건이 1930년대 호남 최대 규모의 항일조직이 발각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해남군을 중심으로 11개 군에 걸쳐 조직된 전남운동협의회, 전남경찰부 고등과의 지휘로 해남을 비롯한 완도, 장흥, 강진, 영암, 목포, 보성, 순천, 여수, 진도 등지로 긴급 수사력이 발동됐다.
관련자를 검거하는 데만 6개월, 조직원 중에 현직 경찰에 몸담은 이가 있는가 하며 일제강점기 때 관변조직이었던 농촌진흥회 소속인사와 면장과 면서기, 동장 등 다수의 공직자도 혐의자로 검거됐다. 
조직이 워낙 치밀해 경찰은 물적 증거를 잡는데도 애를 먹었다. 광주 경찰부 고등과의 지휘로 558명이 검거되고 이중 57명이 치안유지법과 출판물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됐다.
전남운동협의회가 발각되자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간하며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동아일보도 연일 사건을 보도했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 일본 총독부의 간담을 싸늘하게 하고 전국의 이목을 끈 것은 조직이 방대한데도 너무도 치밀하게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1932년 초에 결성된 전남운동협의회는 농촌마을을 조직의 가장 기본토대로 삼으면서 면과 군단위 조직을 건설했고 전체 조직을 지도할 상부조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또 운동은 해남과 완도에서 출발했지만 최종 목표는 전국적인 항일조직체의 건설이었다. 합법성을 가장한 독립운동, 조직도 워낙 촘촘한 점조직이다보니 경찰이 조직의 실체를 밝히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또 조직이 방대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워낙 많아 담당검사는 각 경찰서를 돌며 취조를 했고 첫 공판도 2년 후인 1936년 5월에야 열렸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전국적으로 항일운동이 주춤하던 때에 조직된 전남운동협의회는 북평 이진출신 김홍배가 주도했다. 
북평면의 부잣집 아들이었던 김홍배는 1909년 김행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김홍배는 서울 경성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다. 
그는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대학에서 퇴학을 당한 후 1932년 고향으로 돌아온다.
부잣집 아들에 일본 유학파, 당시 모든 이들이 우러러 봤을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자 항일운동 조직체 건설에 나선다. 
김홍배는 완도의 황동윤과 강진의 이기홍 등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를 건설하는데 이 조직은 1년 만에 11개 군으로 확대된다. 짧은 기간에 11개 군에 걸친 조직건설, 그리고 수천명에 이른 회원의 확보는 김홍배의 조직구성 능력을 보여준다.
1936년 12월 김홍배는 완도 황동윤과 함께 3년의 형량을 선고받는다. 그는 출옥 후 사상범으로 거주제한을 받아 목포와 광주에서 생활하다 일제의 강제적인 사상전향을 거부해 다시 사상범을 수용했던 청주예방구금소에 수감된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석방된 그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에서 조직부장을 맡는다. 그러나 경찰에 체포돼 광주형무소에 수감되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후퇴하던 군인들에 의해 1950년 7월 처형된다.
식민지 하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믿었던 사상이 민족을 구해줄 것이란 신념으로 험난한 길을 택했던 김홍배, 일본의 탄압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 그는 땅끝해남에서 항일의 불을 지폈다.
김홍배가 뿌린 전남운동협의회는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로 조직이 파괴되지만 이후 완도와 강진, 장흥 등지에서 재건운동이 꾸준히 전개된다.
4년여에 걸친 재건운동은 모두 경찰에 적발되지만 전남운동협의회의 뿌리 깊은 생명력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한편 정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8년 11월 김홍배가 주도한 전남운동협의회를 항일운동단체로 규정했다. 또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으로 검찰에 송치된 57명 가운데 30명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았다. 
그러나 기소된 인원 중 김홍배를 비롯한 황동윤, 이기홍 등 핵심적인 역할을 한 관련자 27명은 추서 받지 못했다.
다만 이들의 전남운동협의회 활동 사실만을 인정했다.
따라서 1930년대 일제의 수탈에 맞서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투쟁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요구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소작쟁의 운동을 넘어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평가받고 있기에 참여자 모두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남운동협의회의 수칙에도 ‘애국자들이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일본 세력을 내쫓고 우리 민족의 뜻에 따라 우리 조국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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