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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마지막 제국 침미다례, 해남 마한사를 복원하다 ①해남 마한시대 시기와 성격 규명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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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5  14: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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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미다례, 마한의 정통성 놓고 백제와 경쟁하다

   
▲ 마한시대 국제 해상도시였던 송지면 군곡리 패총 발굴조사 현장공개 설명회.(2018년 12월)

 한반도에 마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세기경이다.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에 걸쳐 존재했던 마한은 54개국의 연맹체 국가였다. 
그런데 54개 연맹체 중 백제가 성장하더니 마한의 소국들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3세기경에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까지 점령하며 연맹체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에 반발한 침미다례는 나머지 소국들을 결집해 연맹체의 맹주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경기, 충청의 마한세력들은 백제를 중심으로, 전남북에 걸쳐있던 마한세력들은 침미다례를 중심으로 두 개의 연맹체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때 백제의 중심지는 한강을 낀 한성이었고 침미다례의 중심지는 해남이었다. 두 맹주국은 마한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했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며 외교전까지 펼쳤다. 
중국 사서인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동이 마한 신미제국(東夷馬韓 新彌諸國)이 282년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 수가 29개국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침미다례(신미제국)가 백제의 남하에 맞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중국 진나라에 사신 파견

목지국 중심의 마한역사 서술로 인해 침미다례는 생소한 이름이 됐다. 그러나 침미다례는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마한의 29개국을 거느린 국가였고 29개 연합국가를 대표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을 만큼 큰 제국이었다.    
침미다례라는 이름은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일본서기 신공왕후(369년) 조에 ‘왜는 가야 7국을 치고 서쪽으로 군사를 몰아 고계진을 점령한 후 남쪽 오랑캐인 침미다례를 도륙해 백제 근초고왕에게 주었다’는 기록이다. 
학계에서는 중국사서 진서에 등장하는 신미제국과 일본서기에 나오는 침미다례를 동일한 나라로 해석하며 침미다례로 통일해 부른다.
54개 마한의 소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성장하기 전까지 전남북에 위치했던 마한소국들은 평화로웠다. 중국 한나라가 세운 사군현과도 거리가 멀었고 가야와 신라와의 사이에 진한, 변한이 있어 전쟁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평화 누리며 풍요로운 삶

침미다례가 이러한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중국은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가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이후 권신이었던 왕망이 황제 자리를 꿰차고 나라 이름도 신(新)나라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왕망의 화폐개혁으로 나온 것이 소액주화인 화천(貨泉)이다. 
기원후 14년에 발행된 신나라 왕망이 만든 화천이 송지면 군곡리 패총지에서 출토됐다. 화천은 군곡리뿐 아니라 경남 사천, 광주시, 제주도, 일본 등지에서도 발굴됐다. 화천은 당시 해상교역로를 알게 해주는 유물이다.
화폐개혁 등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꿈꿨던 왕망의 신나라는 15년 만인 23년에 멸망하고 다시 무제가 등장해 한나라를 복원시킨다. 이때의 한나라는 신나라 이전의 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후한이라 부른다. 한나라를 복원한 한무제는 정복전쟁을 일으켜 BC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이곳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 송지 군곡리 패총에서 발견된 ‘화천’

낙랑·대방, 일본과 해상교류

송지 군곡리에 자리한 해상세력은 한사군인 낙랑 및 대방 등과 해상교류하며 부를 축적했다. 한사군의 위치는 평양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중국 요동과 요서에 있었다는 설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한사군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면 송지 군곡리 해상세력은 중국 대륙에 있던 한사군과 교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까지도 침미다례는 평온한 나라였다.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듯 이들은 성도 쌓지 않았고 말도 타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후 282년 침미다례가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이는 백제의 남하정책에 그만큼 위협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가 성장하고 마한의 세력이 호남지역으로 국한될 때 중국은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삼국시대였다.
소설 삼국지의 무대였던 촉나라와 오나라, 위나라 중 가장 강성했던 나라는 조조의 위나라였다. 그러나 조조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조조가 죽은 후 그의 신하였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막고 촉나라를 멸망시킨다. 또 그의 손자 사마염은 손권의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했다.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위나라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고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마한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침미다례가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진나라는 침미다례의 사신 파견을 ‘매년 풍년이 들고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고 기록할 만큼 침미다례의 사신파견을 외교적 성과로 받아들였다.

   
▲ 현산면 신방리 앞 백포만은 간척지가 됐지만 바다였을 때의 사행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송지 군곡리에 해상도시 건설

이때 진나라의 수도는 중국 낙양이었다. 해남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중국 대륙으로 향하는 길은 뛰어난 항해술이 필요했다.    
이 시기 왜는 야오이 시대로 나라의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백제의 성장과 남하정책, 왜의 성장으로 침미다례도 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마한시대 무덤 양식은 항아리 무덤인 옹관묘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옹관묘는 철기가 유입된 마한시대에는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해남은 전 국토가 마한사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땅만 파면 옹관파편이 출토된다. 특히 삼산면과 화산, 현산, 송지면 등 해남반도에서만 집중 발굴되고 있다. 해남반도는 백포만을 끼고 있는 곳으로 바다를 중심으로 발전한 곳이다. 해남 최초인류 거주지인 신석기시대 유적도 현산면 두모리에 위치한다. 또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도 해남반도에 집중 조성돼 있다.      
현산면 백포리와 관동을 끼고 있는 백포만은 고대부터 발달된 항구였다. 이유는 일본과 중국, 가야를 왕래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처가야 했던 중간 기착지가 백포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백포만 일대는 신석기 시대에 이어 청동기시대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고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풍요를 그대로 이어받아 제국으로 발돋움 한 것이 마한세력이다. 마한세력은 백포만의 항구를 이용해 일본 및 중국과 해상무역을 하며 송지면 군곡리에 국제해상도시를 건설했다.
그렇다면 송지면 군곡리가 마한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침미다례의 중심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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