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성 발굴조사 중 
땅에 묻힌 홍교 중수비 발견

▲ 해남읍성 발굴조사 중 발견된 남천교(홍교) 중수비와 청류정 비석

 해남읍성 발굴조사 중 홍교 건립이 기록된 남천교 중수비가 우연히 발견됐다. 
옛 문헌에는 해남천을 해남읍성 남문 쪽으로 흐른다해 남천(南川)이라 했고 홍교(무지개다리)를 남천교(南川橋)라 칭했다.
해남군은 신청사 건립을 위해 해남읍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땅속에 묻혀 있던 남천교 중수비와 함께 ‘청류정’이란 비석을 우연히 발견했다.
해남문헌집에는 남천교 중수비 내용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옛날 읍지에 이곳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무술년인 1778년 여름 홍수에 허물어져 버렸다. 그 후 흙과 나무로 다리를 대신했지만 해마다 무너지길 반복했다. 이에 1781년(정조 5년)에 스님에게 시주를 요구하고 돌을 깨기를 청해 무릇 68일 만에 무지개다리를 만들었다. 다리에는 용머리 두 개를 조각해 매달았고 풍경을 다리 아래에 매달아 놓았다’ 고 적고 있다.
당시 남천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로 용머리 조각과 풍경을 매달아 놓아 꽤 화려한 다리로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수비에는 공사를 주관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함께 총념(憁念), 총밀(憁密), 봉찰(奉察) 이라는 화주승이 기록돼 있다.  
구전대로 무지개다리였던 대흥사 피안교를 뜯어 남천교를 홍교로 재건했을까.
대흥사 피안교는 1751년 폭우로 다리가 유실되자 무지개처럼 둥글고 용이 누워있는 모형 즉 홍교로 만들었다. 다리의 외형이 어찌나 아름답고 튼튼하던지 공사에 참여한 여러 장로(張老)들이 두륜산은 무너져도 이 다리는 이지러지지 않고 만폭이 말라도 다리는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답던 피안교가 새로 조성된지 30년 만에 헐리고 만다. 「대둔사지」에는 어떤 지사가 웃으며 대흥사 풍수를 논하면서 ‘이 다리를 허물지 않으면 대둔사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 속은 어떤 무뢰한이 자기의 힘만 믿고 캄캄한 밤을 이용해 이 다리를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대흥사 피안교를 허문 시기와 남천교가 중수된 해가 맞아떨어진다. 또 남천교 중수비 내용에 스님들이 지었다는 내용과 화주승 이름도 기록돼 있다.
대흥사 피안교를 그대로 옮겨와 남천교를 무지개 모양으로 건립했다는 구전이 힘을 얻는 이유이다. 
특히 남천교 중수비에 기록된 화주승은 대흥사에서 중요 소임을 맡았던 스님들이었다.
이때 허물어진 피안교는 1967년 김종필 전 총리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편 남천교인 홍교는 해남8경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남천교 중수비와 함께 발견된 ‘청류정’은 맑은 물이 흐른다는 누각으로 당시 남천교 인근에 세워져 있던 비각이다. 문헌에는 남천교 인근에 해남읍성 남문 누각인 정원루(靖遠樓)가 존재했고 정원루에 앉아 홍교 밑을 흐르는 물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읊은 시조 ‘홍교유수(虹橋流水)’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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