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倭)계통 북일 장산리 고분…학계는 한때 비밀에 부쳤다

 

 

왜계통 고분군 영산강 일대 집중분포
무덤 주인은? 한·일학계 뜨거운 감자

▲ 영산강 유역에선 13기에 이르는 왜 계통의 전방후원분이 발견되고 있어 한일 고고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위쪽부터 함평 신덕리 고분, 고창 칠암리 고분, 해남 삼산 용두리 고분)

백제의 남하정책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에 있던 마한 소국들은 백제에 복속됐지만 영산강 일대의 마한세력은 해남에 있었던 침미다례를 중심으로 여전히 건재했다.  
그런데 5세기 들어 마한의 대표 무덤양식인 옹관묘는 사라지고 대신 왜 계통의 무덤양식이 영산강 일대에 자리 잡았다. 
1984년, 북일면 방산리에 위치한 거대한 고분이 발견됐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학계까지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시작. 일본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이 북일에서 발견된 것이다. 
전방후원분이란 시신을 묻는 봉분 주변을 둥글게 만들고 그 전면에 사각형 단을 마련한 무덤 형식으로 일본에선 3~6세기 광범위하게 조성된 무덤 양식이다.  

비밀에 부쳤던 북일 장고분

▲ 함평 금산리 전방후원분에서 나온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 모양 토기.

주민들 사이에서 장고분, 쌍분이라 불리던 야산을 접한 故황도훈 원장은 인공적으로 축조한 시설임을 간파하고 당시 전방후원분의 권위자인 강인구 원로학자에게 알리지만 들려온 이야기는 아직은 덮어둘 때라는 답변이었다. 일본계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이 해남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역으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방산리 전방후원분은 1년여간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1985년 12월 강인구 교수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한일학계를 뜨겁게 달군 전방후원분은 이후 영산강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전방후원분은 ▲전북 고창군 칠암리 고분 ▲전남 영광군 월산리 월계고분 ▲담양군 고성리 고분(월성산 고분)과 성월리 고분(월전 고분) ▲광주 월계동 1ㆍ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長鼓山)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杓山) 고분군 중 제1호분 ▲함평 신덕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영암군 자라봉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 삼산 용두리 고분 등 총 13기이다. 이중 삼산 용두리 고분을 포함한 50% 정도가 발굴조사 됐고 북일 방산리 고분은 시굴조사만 한 상태이다.

속속 나타나는 왜 계통 고분

처음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서 발견됐을 때 우리나라 무덤양식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이 모두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조성된 반면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3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또 4세기 무렵에는 고분(古墳)시대로 일컬어질 만큼 전방후원분이 일본 전역에서 조성돼 숫자만 4,000여 기에 이를 정도다.
따라서 1980년대에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전방후원분은 일본에만 존재하는 일본 고유의 문화적 특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고고학계에선 임나일본부와의 관련을 우려해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또는 부정하려는 현상조차 일었다. 
이런 우려를 보여준 것이 함평 신덕고분 발굴이다. 이 고분은 1991년 약 한 달 동안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수습 유물 또한 왜색이 짙어 발굴성과에 대해선 함평 신덕고분 조사개보라는 행정보고서만을 작성해 관계기관에 배포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자 학계의 입장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전방후원분이 일본계통이라는 데는 다들 인정하는 추세이다. 
다만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에 대해선 현지의 수장층이라는 견해와 왜인이라는 주장이 서로 맞선다.
전자는 왜의 영향을 받아 백제 현지인들이 축조한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후자는 왜인은 맞으나 백제가 지방통치를 위해 ‘채용’한 일본인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무덤조성시기가 100년 이내여서 왜(倭)가 호남지역을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왕릉급 무덤이라 더 화제

영산강 유역에 집중 분포된 전방후원분은 크기가 왕릉급이어서 더 관심을 받았다.
해남 북일면 장산리 전방후원분은 길이 77m, 함평 금산리 고분은 60m급, 고창 칠암리 고분은 55m 크기로 대형이다. 신라의 황남대총 북분과 남분은 각각 직경이 70m 정도, 고구려의 태왕릉은 63m, 백제의 석촌동 3호분 50m와 비교해도 한반도에선 왕릉 규모이다.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전북 고창의 칠암리 고분이 5세기 후반으로 가장 이른 연대를 보이고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이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도 왜식 계통이 짙다. 광주 월계동 전방후원형 고분에선 일본의 하니와형 토제품이, 함평 금산리 고분에선 흙으로 빚은 인물과 동물 모양의 토기 조각이 나왔다.
무덤의 외부에 흙으로 빚은 인물, 닭, 말 모양의 형상을 때는 일본의 하니와(埴輪)를 닮은 모양새다. 

부장품도 왜(倭) 계통

▲ 신안군 안좌도 배널리 고분에서 발굴된 왜 계통인 철갑옷.

영산강 일대에선 왜 계통인 전방후원분뿐 아니라 횡혈식석고분도 다량 발견되고 있다. 해남에는 현산 월송리 조산고분과 북일면 외도 고분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전방후원분과 횡혈식고분에서 전쟁과 관련된 철제무기와 말 관련 도구가 다량 발굴되고 있다.
중국 사서인「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마한인은 말을 탈 줄 모른다고 했고,「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마한인들은 소와 말을 탈 줄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사회 말은 전쟁의 상징이다. 
그런데 마한인들이 말을 탈 줄 몰랐다는 것은 전쟁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5~6세기 왜 계통 무덤에서 철제무기와 말안장 관련 유물이 나오고 있다. 함평 금산리 전방후원분과 해남 현산면 월송리 조산고분에서도 무기류와 말 관련 유물이 쏟아졌다. 
신안군 안좌도 배널리고분에서도 갑옷, 투구, 칼, 창, 철제거울 등 다량의 왜계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왜계 부장품은 고흥 안동고분, 야막고분 해남 북일 외도고분 등 서남해안지역과 영암 장동고분 등 영산강유역의 고분에서도 발굴됐다. 
평온했던 영산강 유역일대에 말을 타고 철제 무기로 무장한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왜(倭) 무덤, 영산강 일대서만

5~6세기, 전형적인 고대 일본 묘제로 알려진 전방후원분이 유독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일부 일본학계에선 임나일본부 중 4현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기 왜는 5왕 시대이다. 다섯명의 왕은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의 송나라와 남조에 사신을 보내 중국 황제로부터 관직을 요청했다.
이중 왜 무왕은 중국 송나라 순제에게 왜와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의 6국을 관할하는 안동대장군을 요구해 제수받았다는『송서(宋書)』기록이 나온다.  
또『일본서기』신공기(神功紀) 49년(369년)조에 왜가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전남 강진)에 이르고 남쪽 오랑캐 침미다례(해남)를 정벌하고 비리(전북지역 추정)·벽중(전북추정)·포미지(전북추정)·반고(나주 반남) 등 4읍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 편찬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해졌고『송서』왜국전의 문헌기록은 과장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일본학계, 임나일본부 주장

▲ 광주 월계동 전방후원분에서 나온 하니와형 토제품

특히 일본열도가 통합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들어서인데 5세기에 한반도 남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것은 일본식 해석이라는 비판이다.  
동신대박물관 이정호 관장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가야와 영산강 일대의 점령은 왜가 아닌 백제 근초고왕이 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근초고왕은 일본열도와의 해상교통로를 안정시키기 위해 마한과 가야를 치는 남하정책을 취했지만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해야 했다. 이 시기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에게 패퇴하고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이전해야 했다. 
따라서 백제는 근초고왕 때 서해와 남해안에 뒀던 군사거점지를 정치군사적 동맹관계이자 마한 정복과정에 합류했던 왜계 군대를 배치해 관리 역할을 줬던 것으로 해석한다.
또 학계에선 현대적 시각으로 고대사회를 보는 것을 경계한다.
고대사회는 지금처럼 나라 간 국경이 확실치 않아 한반도 사람들이 왜로 넘어가 선진문물을 활발하게 전파할 수 있었고 왜인들도 한반도 곳곳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투에 왜 용병을 투입시키고 일본에 있던 동성왕은 왜인의 호위를 받으며 웅진으로 들어왔던 점을 들어 백제와 왜의 활발한 교류를 예로 들고 있다.  

활발한 해상활동의 흔적
 
이러한 사실로 미뤄 영산강 일대에 나타나는 유적과 유물은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의 흔적으로 봐야지 서로 상대방을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근거로 보는 것은 현대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마한의 마지막 세력이 누구에게 정복됐는지 여하를 떠나 해남의 마한은 4세기로 끝이 난다. 다만 나주 반남과 영암 일부, 무안 일부에선 6세기 전반기까지 마한의 대표 묘제인 옹관이 나온다. 이에 대한 이유로 백제와 왜의 침략에 항복을 했기 때문에 일정정도의 자치권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주 반남을 중심으로 한 일정 지역에선 전통의 옹관고분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지만 그 바깥 지역인 해남과 나주 일부, 함평, 영암, 영광, 광주, 장성, 담양, 화순, 전북고창에선 왜 계통의 전방후원분과 횡혈식석실분이 나온다. 지리적으로 마치 옹관고분 세력을 포위하는 형국이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영산강 일대에 조성됐던 왜 계통 무덤은 6세기 후반에 이르러 끝이 나고 대신 이 지역에 백제식 석실이 등장한다. 이때는 백제가 충남 부여의 사비로 도읍을 이전한 시기다.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에 패퇴한 후 국가적 위기를 복구하고 내정이 점차 안정되자 성왕 대에 도읍을 사비로 이전한 것이다. 
특히 6세기 후반 백제 동성왕 대에 이르러 영산강 일대는 백제에 편입된다.  
단 동성왕이 광주에 있던 무진주까지 제재를 받지 않고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영산강 일대 세력이 백제와 적대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영자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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