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는 황후 구하고…조부는 해남서 독립군 자금대다

▲ 조부인 김영학이 1933년 상량한 계곡면 당산리 고가에서 도올선생이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국 혼란할 때 출생

도올의 조부인 김영학(金永鶴)은 김중현(1844~1914)의 큰아들로 1876년(호적상 1874)에 태어났다. 당시는 나라도 집안 형편도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다. 조선은 군사력을 동원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굴욕적으로 체결해야 했다. 그 결과 조선은 일제에 부산, 인천, 원산항 등을 개항하고, 치외법권까지 인정해주고, 측량권도 주어 조선 침략용 상세지도가 탄생했다. 김영학은 사실상 조선 병탄의 신호탄이 울린 해에 태어났으니 굴곡진 그의 삶도 나라와 궤를 같이하게 된다. 
그의 출생지는 서울 중부 누동 43통 7호이다. 지금의 종로구 묘동인근으로, 창덕궁 돈화문 남쪽인데 종묘와 운현궁 사이에 해당한다. 현재는 우리나라 심장부이나 당시 그곳에는 유기공장이 있었다. 부친 김중현이 충북 제천에서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장성한 후 상경해 유기공장에 다니며 매우 어렵게 살았다는 곳이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였을 때 영학은 창덕궁 돈화문 근처에 살았다. 7살이었으니 폭동을 못 보았을 리 없고 민비를 업어 피신시킨 군졸인 부친의 고뇌에 찬 모습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을 것이다.  

해남윤씨와 연을 맺다

▲ 도올 선생 부부가 모친이 살았던 계곡 성진리를 찾아 주민에게 서명한 자신의 책을 선물하고 있다.

그가 혼란스러운 서울의 생활을 접고 땅끝 해남으로 내려온 것은 부친 김성택(이하 김중현)이 해남 현감 발령을 받은 1886년, 그의 나이 11살 무렵이다. 중현은 해남에 뜻을 두고 모친을 비롯한 전 가족을 데리고 연동에 터를 잡았다. 해남현감을 4년간이나 했는데, 여타 현감들이 1년 전후인 것에 비하면 서너 배 길다. 그의 특별한 업적 때문이다. 전라감사의 상소문에 의하면, 큰 한해가 들어 어려워지자 녹봉을 희사하고 세금 만 냥을 대납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다. 1888년에 해남읍, 현산 월송, 우수영에 그 공적비가 전한다. 영학은 연동에 살면서 부친의 뜻에 따라 공재 선생의 7대 손녀 해남윤씨(尹龍南, 1871~1918)를 배필로 삼았다. 

동복군수가 돼 선정

김영학은 부친 김중현이 전라병마절도사로 강진 병영에서 근무하던 1891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다음 해 6월, 불과 17살이 되던 해 진사(進士)가 됐다. 당시 거주지는 해남읍 연동으로 기록돼 있다. 1893년에는 무과에 합격한 후 다음 해에 6품관이 돼 1899년 5월 부여군수에 오르고 이어 한 달 만에 화순의 동복군수가 됐다. 
구전에 의하면, 영학이 동복군수로 부임했을 때 도난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당지에 있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장작을 패게 했고, 왼손잡이를 색출해 자백을 받아냈다. 도난당한 현지의 도끼질을 현장 검증해 왼손잡이 소행으로 추론했던 것이다. 이렇게 송사를 정밀하게 판단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게 하니 동복군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또 이방들은 사또 방에 들어가면 그 위엄에 기절할 정도로 그의 눈에선 광채가 났고 거동에서 서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고종 부름받고 덕수궁 돌담 쌓다

부친 김중현은 명성황후를 업어 살렸고, 아들 김영학은 고종황제를 보호하는 덕수궁 돌담길을 쌓았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나라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셈이다. 도처에서 조속한 환궁을 요청했으나 고종은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러시아 공관이 더 안전해 환궁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고종은 내외의 압력에 따라 1897년 2월25일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환궁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경복궁을 피해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을 택했다. 그리고 체면을 세우려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해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고종의 일본군에 대한 공포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대책으로 덕수궁의 담을 성벽수준으로 높이 쌓는 묘수를 찾아냈다. 이어 고종은 각처에서 믿을만한 관리 10여 명을 차출해 돌담 쌓기 감독〔監董〕을 맡겼다. 동복군수였던 김영학도 차출돼 한양으로 올라갔다. 
고종은 영학이 명성황후를 업어서 살린 김중현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 터라 특별히 불러들인 것이다. 1900년(고종 37) 1월 덕수궁 돌담길이 완공됐다. 고종은 그 공을 높이 평가해 6품관 동복군수였던 김영학을 정3품 당상관으로 무려 6단계 승진을 시켰다. 이렇게 영학은 고급관료로 진입을 목전에 뒀으나 같은 해 6월25일 어머니 안동김씨가 사망하자 동복 군수를 그만두고 해남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가 다시 한양으로 올라간 것은 유학자로서 연동에서 3년 동안 모친의 상례를 다한 이후였다.

항일을 준비하고 해남으로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박탈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이제 나라는 망국으로 치달았다. 전국에서는 을사오적에 분개하고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이 봉기했다. 
이런 난국이 전개되자 영학은 관직에 더 이상 뜻을 버렸다. 대신에 일본의 실체를 알고 투쟁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일어를 학습하고 항일을 준비했다. 먼저 교동사립학교에 진학한 후 일본어 야학 속성과를 1906년 7월 7일 졸업했는데 교동사립학교는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 학교는 1909년 5월에 교동사립오성학교로 다시 사립서북협성학교로 개명됐는데, 김좌진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했다. 
이후 영학은 서울 기독교청년회관(YMCA) 일본어야학과에 진학해 1909년 6월15일에 졸업했다. 당시 기독교청년회관은 개화파 지식인과 청년들의 활동 근거지였으며, 일제하에서는 항일운동과 계몽운동의 산파역할을 했던 곳이다. 1910년 8월 한일합병 늑약으로 조선의 국권이 상실되자 해남으로 내려왔다.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14년 9월27일 부친 김중현이 사망했다. 
중현이 해남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호(號) 외에도 장례행렬과 학동 묘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호와 같이 해은(海隱) 즉, ‘해남에 숨어 살다’가 천명을 다했다. 그의 장례행렬에는 사방의 걸인들과 가난한 민중들이 자진해서 수백 개의 만장을 만들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옥천 복덕산 아래 학동리에다 자신의 묘터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오르내렸던 연동의 뒷산 덕음산 정상을 바라보면서 영면에 들어갔다. 이는 아들인 영학이 부친의 유언을 따른 결과임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영학 계곡면에 둥지 틀다

▲ 1910년 김영학의 5칸 겹집 기와집이 있었던 계곡 성진을 찾은 도올 선생.

부친이 사망하자 영학은 연동에서 계곡면으로 주거지를 옮긴다. 먼저 별진(지금의 성진) 291번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 목포 북교동(168번지)에도 집을 장만하고 해남과 목포를 오가며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33년에 별진과 목포의 생활을 완전히 접고 계곡면 당산리 372번지에 정착을 한다. 그때 지은 고가 2채가 실존한다. 
당시 영학은 상당한 거부로 계곡면 일대에 수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일제 때 작성된 토지 원부에서 확인된다. 개인적인 정보라 밝히기는 그러하지만 당시 그의 땅을 밟지 않으면 계곡면을 지나갈 수가 없다는 표현이 이를 두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영학은 이러한 재산을 부친 중현과 같이 나라와 남을 위해 의미 있게 사용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병든 소녀 구하고 계몽 활동 

목포에서의 활동은 한일합방 전 서울에서의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활동기간은 1910년대 중반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이다. 먼저 병든 소녀를 구했다는 1917년 10월 매일신보 미담기사가 처음이다. 목포의 독지가인 김영학은 걸인 이귀녀(李貴女 19세)가 행려병자로 거의 죽게 된 것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지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하면서 완치를 부탁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집안을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든지 박대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지 즉, ‘측은지심’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기독청년회 활동 중 강연회 개최, 목포부 운동부의 간부 활동, 목포부협의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민족은행인 호남은행 설립

▲ 1920년 김영학 등이 세운 목포 호남은행 건물, 지금은 목포문화원으로 바뀌었다.

1921년 3월에는 본사를 목포로 하는 전남신보사(全南新報社)를 설립하기 위해 현준호(玄俊鎬: 현정은 현대 회장의 조부), 김영학 등 10여 명이 50원씩 투자한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여기에서 그의 신분은 호남은행 취체역이다. 취체역은 오늘날의 이사를 말하며 호남은행의 설립에 참여했음을 알려준다. 
호남은행은 1920년 광주와 목포에 설립됐던 민족계 은행이다. 호남의 갑부인 현준호와 목포의 거상 김상섭(金商燮) 등이 주동이 돼 광주와 목포를 중심으로 설립했는데 여기에 함께한 것이다.
호남은행은 호남의 지주자본과 상업자본의 규합으로 창립·발족된 순수한 민족계 은행이다. 지방 유지들은 한국 실업인의 금융을 전담하는 민족계 은행의 설립을 절실히 요망하게 됐고, 이에 1920년 8월 은행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운영에 있어서도 끝까지 일본인 자본의 가담을 배제하고 순수 민족자본만으로 운영됐다. 직원도 모두 조선인이었다. 일제는 1928년에 신은행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호남은행측은 식민지 지배당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 고 독자운영을 고수했고, 이에 총독부는 일본인 자본의 참가를 거역하고 일본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동일은행(東一銀行)과의 통합을 강압했다. 그 결과 결국 1942년 4월30일에 강제합병됐다. 호남은행 건물은 지금 목포문화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독립군 자금책 홍우찬과 사돈

 도올 선생의 어머니는 광주 홍안과 집안의 장녀 홍희남(1910~2004)이다. 이화여전을 다니다 1916년(17세) 별진으로 시집을 와서 3년을 살았다. 독립운동을 했던 홍우찬의 맏딸이자 광주 홍안과 홍승민 원장의 큰누이이다. 도올 선생의 아버지 치수와의 만남은 드라마같이 시작된다. 
치수가 공부를 하고 싶어 아버지 영학의 금고에서 300원을 꺼내 단신상경해 휘문고보를 다닐 적이다. 
홍우찬은 독립자금 주선과정에서 휘문고보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우연히 교정에서 똘똘하게 생긴 학생과 몇 마디를 건넸는데 마음에 들어 학생의 뒤를 밟았다. 손녀 사윗감으로 찍은 것이다. 그런데 치수가 들어간 집을 따라가니 아주 가까운 친척 홍씨 집이었다. 이는 천생연분이라 여기고 짝을 맺게 됐다. 이런 인연으로 영학은 우찬과 사돈관계가 됐다. 
홍우찬은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한 사람으로 한때 자금 모집책으로도 활약했고 이로 인해 감옥생활을 했다고 구전한다. 이런 구전은 신빙성이 높다. 만주의 일본 육군성이나 조선군참모부에서 보고한 내용에 홍우찬 활약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1919년 9월에는 조선독립단지(斷指)결사대를 조직하고 간도지방에서 행동한 명단에 들어있고, 이어 10월에는 철혈광복단으로 만주의 지역별 독립군 활동 정황보고에서 확인된다. 이어 1932년 2월 기록에는 한국독립당 제3지당 간부 홍우찬 등은 모아산(帽兒山)에서 비상간부회를 개최하고 독립군을 재편성했다고 적고 있다. 

별진 땅을 독립군 자금으로

1931년과 1933년 김영학은 계곡면 성진리 땅 50여 필지를 한꺼번에 매도했다. 이 거금의 용도가 미상이다. 1933년 계곡 당산리에 땅을 사서 집을 짓기도 하지만 당산리 일대에 아직도 수십 필지가 남아 있는바 건축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많다.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였다는 물적 증거는 없으나 정황 단서는 많다. 서울 학교에서 독립운동가와의 인연에 이어 호남은행을 함께 설립하고 독립군자금을 낸 현준호와 깊은 인연도 무시할 수 없다(나중에 현준호는 친일로 변절). 당시 대부분의 땅은 현준호의 장남에게 매도되기도 했다. 장손자가 중국 상해에 거주했다는 사실과 앞에서 언급한 사돈 홍우찬이 독립군자금책이었다는 사실은 결정적 정황 증거라 여겨진다. 영학은 1938년 무렵 당산리의 집을 팔고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했다. 건강이 안 좋아지자 상경한 듯하다. 그는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1년에 영욕의 굴곡진 인생을 마감했다(계속). 
변남주(국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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