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간 유지된 유일한 해상왕국 침미다례…전쟁을 몰랐다

 

 

말을 탈 줄 몰랐고 금보다 옥을 좋아했던 사람들 
중국·일본·가야와 무역으로 군곡리에 해상도시 건설

▲ 중국 한나라가 세운 낙랑·대방과 일본 및 가야간의 해상교류는 송지 군곡리를 포함한 서남해안 여러 지역을 거쳐 가며 이뤄졌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마한 사람들은 금, 은, 비단보다 구슬을 귀히 여겨 옷에 달아매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걸어 몸을 치장했다고 적고 있다. 또 마한인은 말을 탈 줄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상징인 기마술을 모르는 민족, 구슬을 유난히 좋아했던 마한은 평화로운 나라였다. 따라서 마한의 54개국은 무력으로 지배·복속하는 관계가 아닌 동맹체였다. 
마한의 54개국이 목지국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인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에 백제가 둥지를 튼다. 또 마한 소국 중 하나인 침미다례도 해남반도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성장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백제의 등장

삼국사기 건국설화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그의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성(慰禮城)에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때 백제는 마한 54개 소국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목지국(目支國)이 마한연맹체를 주도하고 있었다. 
또「삼국지 동이전」진한조(辰韓條)에 마한이 진(秦)의 유망민에게 동쪽 영역을 분할해 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진(秦)나라는 중국 진시황이 세운 나라다. 진시황의 폭정에 시달린 유망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해오자 마한이 이들에게 동쪽 영역을 분할해 줬다는 것이며 이때 분할해준 땅이 진한이다.  
또한「삼국지」에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 진왕에게 종속돼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목지국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을 만큼 마한의 영향력은 컸다.

군곡리에 해상도시 건설

▲ 경남 사천 늑도 폐총지(왼쪽)와 김해 회현리 패총지에선 송지 군곡리와 같은 점치는 도구인 복골 등의 유물이 다량 발굴돼 당시 해상활동을 통해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마한 54개국이 목지국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백제가 한강유역에 터를 잡았을 때 해남에 있던 마한 소국 중 하나인 침미다례는 독자적인 고대사회를 열며 국제해상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해남에 자리했던 침미다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해남반도에 위치했던 것은 유물의 발견으로 보아 확실하며 이때 가장 성장한 해상도시가 송지면 군곡리이다. 
군곡리 해상도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해남반도의 넓은 들녘과 발달된 연안 해역 때문이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해남반도 해안가 주변에 주로 분포돼 있는데 이러한 청동기 문화를 토대로 탄생한 것이 해남반도의 침미다례이다. 
또 침미다례의 성장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육지가 아닌 바다가 중심이었던 당시, 먼바다를 가기 위해선 계절풍을, 연안에서의 이동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야 했다. 즉 일본에서 출발한 배는 계절풍을 이용해 가야(변한) 또는 해남 현산면 및 화산면 일대인 백포만에 닿았고 연안 해역에선 6시간 간격으로 바뀌는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이동했다. 가야지역에서 백포만까지 6시간거리, 다시 백포만에서 출발한 배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선 경남 사천에서 정박해야 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해남 백포만은 마한시대 국제해상항구로 떠올랐고 백포만 해상세력이 건설한 곳이 송지 군곡리 해상도시이다.
또 백포만 세력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일찌감치 중국 및 가야(변한)로부터 발달된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철기시대를 열었다.

철기도 일찌감치 받아들여 

▲ 가야에서 생산된 철제품은 해남 마한시대 유적지 곳곳에서 발굴되고 있다.(위쪽 김해국립박물관 소장 가야 철, 아래는 국립나주박물관에 소장된 현산 분토리 발굴 철제품)

 송지 군곡리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700~800년 동안 존속했던 해상 도시였다. 해남반도에서 발달한 청동기문화의 토대 위에서 성장한 이들은 기원후 1세기에서 3세기에 가장 왕성한 대외해상교류를 펼쳤다. 
이 시기 평양지역에는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에 세운 낙랑과 대방이 자리하고 있었고 경기도와 충청도, 호남지역에는 마한이, 경상 지역에는 변한의 소국이었던 금관가야가 위치해 있었다. 이때 일본은 중국과 가야, 마한의 선진 문명을 활발히 받아들이며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야요이 시대였다.
특히 철 생산 중심지였던 가야는 철을 매개로 중국의 낙랑, 대방 및 일본과 활발한 해상교역을 전개했는데 이들의 해상교역 가운데에 끼어있던 곳이 바로 해남 백포만을 포함해 전남 고흥, 여수, 경남의 거제도, 사천 등 서남해안 포구였다.
이중 해남반도에서도 마한시대 대표 무덤인 옹관이 송지와 현산, 삼산, 화산, 해남읍 일대서 발굴되고 있는데 옹관묘 안에서는 토기와 철 덩어리, 철칼, 옥 장식품 등이 함께 수습됐다. 옹관묘에서 수습된 철제품은 가야생산품과 동일해 가야와 교류했음을 알게 해준다. 
또 송지 군곡리 패총지와 함께 김해 회현리 패총지와 경남 사천지역의 늑도 패총지는 고대 해상교통로에서 주목받는 곳이다. 
김해 폐총지에선 중국의 화천(동전) 및 복골(점치는 뼈)과 곡옥, 토기류 등이 출토됐는데 송지 군곡리 패총지에서도 같은 종류의 유물들이 수습됐다. 
경남 사천 늑도 패총지에서 출토된 토기와 조개 팔찌, 골각기 등의 유물도 송지 군곡리에서 출토됐다.  

중국, 일본, 가야와 교류
 
중국 역사서인「삼국지」에는 낙랑과 대방군이 왜로 이르기 위해 서해안-한국-남해안-구야한국-대마도-왜로 통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한국이란 지명은 충청도 아산만 일대, 구야한국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김해지역이다. 
따라서 낙랑과 대방은 서남해안의 복잡한 해로를 거쳐 가야와 일본으로 갔고 반대로 일본과 가야도 이 경로를 통해 낙랑 및 대방과 교류했다. 
서남해안에 위치한 포구들이 국제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것은 가야를 비롯해 일본과의 근접성 때문이다.     
이러한 근접성 때문에 서남해안은 고려시대 잦은 왜의 침략에 이어 임진왜란 때도 사천전투와 한산도 및 노량해전, 명량해전 등이 모두 이 해로상에서 치러졌다. 즉 일본은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임진왜란에서 철기시대 국제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서남해안의 여러 포구들을 거쳐 가야 했던 것이다.    
해남의 침미다례가 국제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을 때 한강 인근에 자리한 백제도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 계통의 기마민족이라 전투적이었다. 이와 달리 마한은 말을 탈 줄 모르는 민족, 즉 들녘과 바다가 주는 풍요로움으로 인해 약탈 민족이 아니었다.

전쟁을 몰랐던 침미다례
 
그런데 기원전 18년 한강유역에 자리했던 백제가 마한의 소국들을 차례차례 점령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3세기 후반에 충청도에 위치한 목지국까지 통합해 버렸다. 서로 간 복속관계가 아닌 느슨한 연맹체였던 마한의 소국들은 긴장했다. 그리고 전라도 마한세력들은 경기도와 충청도가 백제의 땅이 되자 해남에 있던 침미다례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중국 진나라에서 피난 온 유랑민들에게 동쪽 땅을 나눠주고 한강 유역에 백제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한 마한인들에게 백제의 타 연맹체 점령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였다. 특히 침미다례는 한반도 남쪽 끝인 해남에 위치해 있어 전쟁과는 더욱 멀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국가 틀을 갖추고 잦은 전쟁을 할 때도 호남지역의 마한세력은 평온했다. 백제는 고구려 때문에 남하에 주저했고 신라는 사이에 가야가 끼어 있어 호남의 마한세력을 넘보지 못했다. 또 왜는 국가로 성장하기 이전이라 왜의 침략도 없었다.  
침미다례가 전쟁을 몰랐다는 것은 발굴된 유물에서도 잘 나타난다. 해남반도에서 발굴되는 마한시대 유물 중 전쟁과 관련된 철제무기와 말안장 관련 유물은 없다. 또 발굴된 철칼은 크기가 작아 전쟁용보단 장식용에 가깝다. 침략을 받아보지 못한 제국, 같은 연맹체라는 유대관계만이 중요했던 마한소국들에게 같은 마한소국인 백제의 침략은 경악이었을 것이다.
해남에서 전쟁관련 유물은 침미다례가 멸망한 이후에 집중 발굴된다. 

중국에 사신 파견

중국 사서인『진서(晉書)』「장화전(張華傳)」에 ‘동이 마한 신미제국(東夷馬韓 新彌諸國)이 282년에 사신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중국 사서에 침미다례(신미제국)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침미다례는 중국 및 일본과의 중개무역을 통해 700~800년 동안 거대한 해상도시를 건설할 만큼 풍요를 누렸지만 외국에 사신을 보낼 정도의 긴박감도, 외교에 대한 절박함도 없었다.
그런데 침미다례를 중심으로 마한소국들이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백제의 남하정책에 그만큼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진서(晉書)』「장화전」에는 침미다례의 사신 파견을 ‘매년 풍년이 들고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고 기록할 만큼 중국 진나라는 이를 외교적 성과로 받아들였다. 이는 침미다례가 이전에 중국과 어떠한 외교도 펼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때 중국의 진나라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국호를 진(晉)으로 바꾼 나라이고 수도는 중국 낙양이었다. 해남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중국 대륙으로 향하는 길은 뛰어난 항해술이 필요했다.    
이때 침미다례의 사신파견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전이었다. 침미다례는 일본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이때의 기록은 왜가 침미다례를 도륙해 백제에게 줬다는 내용이다.
외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침미다례는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마한의 29개 소국 중 하나이자  중심 국가였다. 위치는 해남반도 중 송지면 군곡리로 학계에선 비정하고 있다.

군곡리, 호남 대표 철기유적

▲ 나주국립박물관에는 마한의 마지막 제국 침미다례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송지면 군곡리에서 발굴된 패각층과 발굴 토기가 전시돼 있다.

 현재 4차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군곡리 패총지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중 700~800년간이나 존속된 유일한 해상국가이다. 또 중국의 선진문물과 가야의 철을 받아들여 영산강을 통해 육지의 마한소국으로 전파했다.
특히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의 토기기술이 이곳으로 전해졌다. 고온으로 토기를 굽는 가마의 사용은 토기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술혁신이었다. 
또 기원 후 2~3세기 한반도에 불어 닥친 기후의 한랭화로 농작물이 크게 피해를 입었지만 침미다례는 풍부한 해양자원과 해상중개무역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침미다례의 풍요는 장신구로 이어졌다. 이들은 조개를 정교하게 가공한 팔찌와 수정 및 옥구슬로 몸을 치장하고 사슴뿔로 정교하게 만든 머리빗을 사용했다. 철로 다양한 도구를 만들고 정교한 그릇을 만들었던 기술이 멋진 장신구를 만든 기술로 이어진 것이다.      
침미다례가 건설한 해상도시인 송지 군곡리 유적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까지 유적지로 광주 신창리 유적과 함께 호남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지이다.  
당시 국제항구였던 백포만 항구는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중국 송나라와 관무역 및 사무역을 담당하는 중간 기착지 항구역할을 했다. 백제 중심의 역사로 인해 마한의 29개 소국의 중심이었던 해남의 침미다례는 잊혀진 제국이 됐다. 그러나 해남반도 곳곳에서 발굴되고 있는 집터와 무덤, 각종 유물들은 침미다례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침미다례는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침미다례는 4세기 이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5세기에 이르러선 삼산면과 옥천, 북일지역에 왜 계통의 새로운 해상세력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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