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전라도 정신을 품다. 해남서 그 정신 가르치고 싶다

▲ 대흥사 마애송덕비에 새겨진 증조부 김중현 이름을 살펴보는 도올선생

해남 곳곳 증조부 흔적

도올 선생의 증조부 김중현(金中鉉, 1844~1914)의 원래 이름은 성택(聖澤)이고, 해은(海隱)은 그의 호로 ‘해남에 숨다’란 뜻이다. 그가 해남읍 연동에서 살던 시기, 조선은 세도정치가 기세를 부리고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자 탐관오리가 양산됐고, 사익을 챙기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 밖으로는 일본의 조선 병탄야욕과 서양세력과의 충돌, 신진 지도층마저도 각국을 등에 업고 서로 싸움을 일삼았다. 
해남현감 김중현의 선정은 이런 혼탁한 시기에 이뤄졌으니 더욱 갚진 것이라 할 것이다. 그의 원래 이름 성택은 해남현감 4년 동안 사용하다 1890년 고종이 직접 중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자 개명했다. 고종이 이름을 하사한 것은 명성황후를 업어 목숨을 살렸으니 일본이나 반대파의 위해가 염려됐기 때문이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해남현감 성택은 극심한 한해로 백성들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녹봉을 내놓고 만 냥의 세금을 대납했다. 이에 고종이 그의 특별한 선정을 높이 평가하고, 중현으로 개명시킨 다음 품계를 7단계 올려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발령을 내렸다. 중현의 공적은 각처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해남에 있는 해남읍, 현산면, 우수영 등 3처의 공적비 외에 새롭게 밝혀진 공적만을 간추려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흥사 송덕마애비에 중현 흔적 

해남현감 재직 시 강진군 화방사 불사에 도움을 줬다. 강진 화방사는 군동면에 있으며 강진읍에서 병영을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다. 특이한 기암을 지나 안쪽에 건립된 명찰이다. 해남현감 김성택은 1888년(光緖 14년)에 강진군 화방사의 나한전을 건축할 때 시주를 했다. 특별히 상당한 시주를 했는지 나한전의 상량문 대시주자 명단에 기록돼 전한다.
1899년 대흥사 북원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강풍으로 인해 대흥사 경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대흥사는 불사를 위해 나라와 민간에서 자금을 조달받고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진행했다.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1901년(신축) 11월에 기록된『불사시종과적(佛事始終課蹟)』이다. 이 책 중 「연화소 방함록(緣化所 芳啣錄)」 편에 감동질(監董秩) 7명 중 1명으로 전 참판 김중현이 언급돼 있다. 감동질은 조선시대 때 국가의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던 벼슬을 말한다. 이어 ‘전 병사 김중현 송덕마애비’가 대흥사 경내에서 발견됐다. 성보박물관 건너편 길가 바위에 암각 돼 전하는데 복원공사 시의 공을 기리기 위해 암각 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관직명 병사는 종2품 ‘병마절도사’의 약칭이며, 오늘날로 하면 전라도 육군사령관이다.

▲ 1954년 도올 선생 가족사진, 뒷줄에서 시계방향 큰누나 숙희(전 교육부장관), 광주홍안과 사촌누나 영자, 아버지 김치수, 어머니 홍희남, 도올 선생(초등 2학년), 누나 용주

담양 광산김씨 취사당 건립 지원

김중현의 본관은 광산김씨이다.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해남으로 와 살았으니 사실상 본향으로 온 것이다. 평장사는 광산김씨 시조사당 이름이며, 지금은 담양 대전면에 편입됐다. 1891년 무렵 문중에서는 교육용 건물인 취사당을 건립했는데 여기에 중현은 거금 백 냥을 기부했다. 그리고 취사당기(聚斯堂記)를 지어 바쳤는데 그 전문이 오늘까지 전한다. 

 모친, 별진으로 시집오다

김중현은 연동에 살면서 맏아들 김영학(1876~1941)을 공재 선생의 7대 손녀 해남윤씨(尹龍南, 1871~1918)와 짝을 맺게 했다. 영학과 윤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낳은 치수(1906〜1992)가 바로 도올 선생의 부친이다. 영학은 한일병탄으로 관직의 뜻을 접고 해남으로 내려와 계곡 별진(성진)에 터를 잡고 목포를 오가며 생활했다. 
1927년에는 아들 치수의 배우자로 독립운동가 풍산홍씨 우찬의 장녀 홍희남(1910〜2004)을 들였다. 
도올 선생의 어머니 홍씨는 별진 시집에서 3년을 살다 서울로 이거했다. 도올 선생은 어머니로부터 3년 시집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한다. 도리 기둥 기와집과 주변 환경, 많은 재산, 이웃집인 민영남씨 등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최근 그 집터와 관련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로 확인됐다. 영학은 많은 재산을 민족은행인 호남은행의 설립과 독립군자금 등으로 대부분 사용하고, 1938년에는 남아있던 계곡면 당산리 가산도 정리해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했다. 그 후 영학은 3년 만에 천명을 다하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이를 도올 선생은 1990년 조부 영학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부 묘, 해남으로 이장 

영학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불상사가 있을 때마다 차남 치수에게 현몽해 그 사실을 알렸다. 도시개발로 공동묘지가 없어지게 될 때도 그랬다. 이때 치수는 아버지 영학이 생존 시 1918년에 돌아가신 해남윤씨 부인에게 지극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광주에 사는 형 익수에게 연락해 해남윤씨 묘가 있는 해남으로 이장했으면 했다. 그러나 익수는 광주 공동묘지 어귀 초라한 언덕에 이장했다. 그 뒤 익수가의 손이 죽음을 당하고, 천안에서 병원을 하던 치수가도 환자들이 불상사를 일으키는 등 환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학은 차남 치수에게 현몽해 “네 놈이 어디다 나를 팽개쳤느냐”하고 도끼를 던지며 달려들었다. 1956년 10월 도올 선생의 어머니 홍씨는 영학의 묘를 찾아내 파묘하니 뼈는 새까만 독버섯으로 덮여있었다. 홍씨는 정성을 다해 씻고 말리어, 영학이 생전에 터를 잡아 해남윤씨를 모신 곳 즉, 별진의 남산에 합장을 했다. 이는 도올 선생이 아홉 살에 이뤄진 일화다. 그 뒤로는 집안이 화평하고 현몽할 때마다 경사가 났다고 한다. 도올 선생은 묘지에 관한 미신이나 신화는 믿지 않으나 위와 같이 꾸밈없는 일화는 천지생명의 한 몸 됨과 산자와 죽은자 사이에도 정성이 오가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후손들은 묘소에 깃든 정성을 이어가도록 당부하고 있다. 

▲ 어머니 홍씨가 익산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던 도올에게 조부 김영학이 보낸 한방처방문과 함께 보낸 편지.

위대한 철학자 도올 탄생

도올 김용옥(金容沃) 선생은 세계적인 철학자이며 사상가이자 한의사요 예술가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대의 등불 또는 사상혁명가로 평가한다. 그가 40여 년 쌓은 업적은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며 하나하나가 실로 대단하다. 그가 저술한 책은 인터넷에서 120여 권이 검색된다. 이런 방대한 저술활동은 다산 정약용에 비견된다. 논어·맹자·노자 등 동양의 고전을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서적에다가 태권도 무도인, 영화와 창극의 작가, 연출가, 언론인 등 다양한 분야에 업적을 쌓았다.
그의 호 도올은 한자로 檮(등걸도) 杌(그루터기올)이다. 해남 말로는 ‘뜽클’이며 베어버린 나무의 뿌리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도올은 ‘역사의 근원’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호와 관련해 십수 년 전 헤프닝도 있었다. 한 문중의 어르신이 도올 선생에게 문중의 책을 보내면서 봉투에 ‘돌 김용옥 선생 귀하’라고 하는 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당시에 선생은 황당했으나 이후에는 호의 뜻을 농담으로 ‘머리가 안 좋아 돌〔石〕이라 했다’고 설명하게 됐다.
 
허약한 체질, 향학열로 

도올 선생은 여·순항쟁이 발발한 1948년 해남출신 치수와 독립운동가의 장녀 홍희남의 여섯째인 막내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치수는 세의전(지금 세브란스 병원)을 졸업하고 경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해남에서 개업한 후 목포, 조치원을 거쳐 마지막으로 천안에서 광제의원을 운영했다. 선생은 어머니가 39세 노산이어서인지 힘들게 태어났고 허약했다. 유독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허약한 몸을 단련하고자 공부는 멀리하고 태권도에 몰두했다. 그런 까닭에 보성 중·고등학교시절에 성적이 우수하지 못했다. 취미가 있던 영어와 생물만은 톱수준이었다고 한다. 대학도 원했던 서울대를 낙방하고 대신 고려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중·고교시절 무리한 운동결과로 심한 관절염을 앓게 됐다. 1965년 가을부터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천안집으로 내려가 광제의원 2층 병실에서 2년 동안 혼자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쓰라린 경험들은 부단한 향학열로 승화됐다.

브루스 커밍스와 만남

이때 도올 선생은 브루스 커밍스(1943~, 미국 시카코 대학 정치학교수)를 만났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 전문가이며 한국전쟁을 연구해 세계에 널리 알린 저명한 석학이다. 커밍스는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며 6·25 전쟁을 세계사의 중요한 장으로서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어머니 홍씨는 막내아들의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천안에 파견된 프레드 블레어를 하숙생으로 들였다. 이 만남은 도올 선생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도올 선생은 블레어의 친구인 커밍스의 자료정리를 도와준 것이다. 영어 실력이 늘어가면서 세계관도 개벽되고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도 제고됐다. 덤으로 농악과 같은 우리문화를 보고 신기하다며 물으면 평화봉사단들에게 설명해주면서 우리문화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오늘날 세계적인 철학자 도올 선생의 탄생은 현명한 어머니 홍씨의 배려와 사랑 덕분이라 여겨진다. 도올 선생은 항상 “어머니는 내 삶의 전부이자 지적인 자이언트”라고 말해왔다.

도전, 험난한 학문의 길

도올 선생은 무도가, 생물학자, 목사의 꿈을 접고 동양철학자로 삶의 진로를 변경코자 했다. 아버지는 “점 볼일 있냐”며 극구 반대했지만 고조선 이래 우리나라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학문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한학의 마스터를 삶의 과제로 삼았다. 1972년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국립대만대학에서 석사, 일본 동경대학에서 석사, 1982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에는 석사학위만 가지고도 대학교수를 하던 때였다. 당시 외국에 나가는 일도 어려웠지만 외국에서 학위를 따는 일은 더 어려웠다. 먼저 그 나라 언어를 습득하고 문화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세계 최고의 명문대에서 공부하는 일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으니, 학문에 대한 그의 집중력은 대만유학에서부터 능력이 발휘됐던 것이다. 덕분에 학비는 대부분 장학금으로 해결됐다. 평생 반려자인 최영애 교수도 대만에서 만나 학문의 길을 동행했다. 선생은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자 학교에 남아달라는 요구를 뿌리치고 곧 귀국했다. 지금도 대만, 일본, 미국의 내로라하는 석학들과 귀한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귀국하자 곧 모교인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됐다. 그러나 4년 후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교수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다시 1990년 원광대학 한의학과에 진학해 한의사가 됐다.
   

▲ 일제강점기 조부 김영학이 해남에서 서울로 보낸 손자들의 한방처방문.

동양고전의 대중화 

도올 선생은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무엇보다 사라져가는 동양 고전의 대중화를 실현한 것이다. 그는 먼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금강경, 노자도덕경 등 동양고전을 아주 꼼꼼히 번역했다. 그리고 치밀하게 준비해 TV 강의에 임했다. 1999년 노자와 21세기 EBS(56회), 2000년 도올의 논어이야기 KBS(64회), 2004년 도올 한국사상사 특강 MBC (26회) 등 350여 회가 그것이다. 그는 매회 강의에서 솔직담백한 특유의 입담을 섞어가며 평범한 청중들을 웃고 울렸다. 이로써 대중들은 어려운 동양 고전을 손쉽게 접하게 됐다.

전라도를 가슴에 품다

도올 선생은 불의를 보고 행동하는 사상혁명가이며, 민중의 아픔을 헤아리는 역사관을 가졌다. 그는 현존하는 최고 권력의 불의를 비판하고 홀로 투쟁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동양고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용기라 생각된다. 또 군사독재, 부당한 정권에 항거하는 민중, 그 약자 편에 앞장섰다. 그는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조선의 봉건적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서양문물이 밀려들어 오는 시기에 민중들에 의해 발전된 반봉건(反封建), 반제국(反帝國)의 경향을 갖는 동학의 사상을 우리나라의 고유한 근대화의 시작이라 평가한다.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기반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평등사상으로 무장됐다. 그리고 부패한 권력과 외세의 침탈에 항거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도올은 이 동학혁명이야말로 우리민족의 내재적 근대성의 출발이라고 본다. 그는 동학을 영화 ‘개벽’, 판소리 창무극 ‘천명’으로 민중예술화 했다. 이러한 동학정신은 1947년 이후의 제주항쟁, 1948년의 여·순 항쟁에 이어 1980년 광주 민주화투쟁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본다. 이 기나긴 투쟁은 임진왜란의 ‘약무호남시무국가’ 정신과 하나로 통한다고 평가한다. 도올 선생은 이런 요소들이 위대한 전라도 정신이며, 이러한 전라도 정신이야말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할 한민족 혼의 덕목으로 꼽고 있다. 2019년 도올 선생은 제주, 여·순항쟁과 관련해『우린 너무 몰랐다』를 저술하고, 각처의 대강연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라도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고향 해남에 봉사하고 싶다

도올 선생은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구습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오로지 자유로운 학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고희를 넘기고 손자가 태어나자 일부 생각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더 나아가 선생은 자신의 정체성은 전라도에 있으며 나의 진짜 고향은 해남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해남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은 지난 4월 18일 전라남도 도청 특강 “전라도 정신의 세계사적 조명”에서 도올 선생이 지어 낭독한 ‘전라도 찬가’ 중 서두와 말미이다. 
전라도, 나의 전라도여! /깨어나라! /일어나라!/천년묵은 때를 씻어내고/만 년 전의 청춘으로 돌아가자! <중략> 전라도는 이 민족 정의의 보루/대의大義의 기준/여순의 항거, 금남로의 핏물은/오늘도 정의의 울돌목이 되어 운다/전라도여!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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