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알에는 발효(醱酵)하는 누룩이 있다고 한다. 발효시키는 균은 공기 속에 있는 모양이다. 포도알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릇 속에 넣고 밀봉만 하면 어디에서나 발효한다. 발효할 때는 속에서 탄산가스가 나오기 때문에 끓어오르는 동안에 일체의 부패균이 죽어버린다. 그리하여 투명한 포도주가 된다. 일단 포도주가 되면 천년도 가고 만년도 간다. 썩을 생명이 썩지 않을 생명으로 바뀌는 길은 발효밖에 없을 것이다.
중생(重生)이란 인간 생명의 발효를 말한다. 인간 생명의 발효에는 탄산가스가 나오듯 강한 죄의식이 드러난다. 나는 죄인의 두목이라고 외치는 것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고도의 투명한 양심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로마서 7:24)’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고백한다. 발효의 극치에 도달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는 털끝만한 죄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효가 끝나면 곧 투명한 감사가 뒤따른다. 포도가 죽고 포도주로 다시 산 것이다. 포도주는 술이다. 불이 훨훨 붙는 술이다. 무엇에나 가 닿으면 생명의 불을 붙이는 전신의 불이다. 인생을 영원한 불이 되게 하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발효하는 비밀은 오직 밀봉(密封)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부대란 새 종교라고 해도 좋고, 새 문제라고 해도 좋다. 새 문제란 별것이 아니다. 자기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 속에 나의 정열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하여 파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끈질긴 탐구 끝에 형이상학적 경험을 체험한다. 이것이 인간이 발효하는 경험이다. 이 발효를 통해서 소아(小我)는 대아(大我)가 되고 썩어질 생명이 썩지 않을 생명으로 탈바꿈을 한다. 발효의 비밀은 밀봉에 있고, 밀봉의 비밀은 하나의 문제 속에 자기를 몰입시키는 것이다. 몰입, 그것이 밀봉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단 발효하면 무색 투명한 자아가 된다고 전 이화여대 교목을 지낸 김흥호목사는 말했다.
절기상 중복이 지나고 한여름 땡볕 더위가 사람들을 산으로 바다로 유혹하는 본격적인 피서철이 시작되었다. 옛글에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다. 산이든 바다이든 일상의 곤고함과 번잡함을 벗어나 잠시 일탈(逸脫)을 꿈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즐겁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풍류(風流)의 도(道)가 있다 하여 맛과 멋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 했다. 명산대천을 찾아다닐 수 있는 여유가 옛적엔 양반들에게만 허락된 전유물이었지만, 상전벽해(桑田碧海)하여 요즘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방방곡곡을 둘러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집과 일터를 비우고 휴가를 떠난다 하여 바캉스(Vacance)라는 프랑스어처럼,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에너지와 비전으로 충전(充電)해야 할 때이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혈기 방장하여 피서지에서 술 마시고 고성방가하다, 괜시리 패싸움이라도 붙을까 염려된다. 인간도 먹었다 하면 싸는 동물인지라 잘 먹고 여기저기 함부로 내뱉었다간 피서가 아니라 피안으로 내려갈 가능성도 농후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삼복 더위는 중생(重生, 거듭남)의 삶을 위해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밀봉(密封)의 기회인 셈이다. 번잡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오히려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는 피서(避暑)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적한 곳을 찾아 며칠 내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나의 참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면 더없는 밀봉이요, 발효 인생이리라. 한 번 발효한 인생은 포도주처럼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보니 삼복 더위의 복(伏)엔 개(犬)가 사람(人) 앞에 엎드리는 모습을 담고 있는 듯한데, 그래서일까. 복날 여기저기서 닭이든 개든 엎드러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닭이나 개가 엎드러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땅에 엎드러져야 제대로 발효가 될 터인데! 허허, 견공들의 수난시대는 언제쯤 끝이 날지. 탐욕과 무지와 분노라 이름하는 수성(獸性)을 죽이고 진선미(眞善美)라 이름하는 인성(人性)을 바로 세울 날은 언제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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