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야 쓰까이!
2013-11-22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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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무척이나 좋습니다.
오래 전에 이미 사라진 이 말을 어떤 이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정감이 새록새록 살아났습니다. 약간은 투박하고 전라도방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말은 이웃 집 아짐, 아재, 시골의 정이 듬뿍 들어있는 따스한 냄새가 풍기는 가슴의 말이어서 좋습니다. 이런 말들은 담의 경계를 헐어낸 말이요 이웃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어째야 쓰까이!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말의 준말이다. 남의 딱하고 어려운 사정이나 사건 이야기를 듣고 안 되었다는 걱정에서 하는 말이다.
‘어떻게 할까’라는 말보다 ‘어째야쓰까이’라는 말이 정감 있게 느껴집니다. 말 자체는 촌스럽고 투박하더라도 그 말이 사용되던 시절의 따스한 풍경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은 제가 어렸을 적에 늘상 듣고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급하거나 안타까울 때 도와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 가슴에서 내뱉는 소리가 ‘어째야 쓰까이!’였습니다.
“아야, 누구네 집 아배가 논에서 쓰러졌다고 하네. 어째야 쓰까이!”
“옴매 큰일났네. 어째야 쓰까이!”
마음을 열고 서로를 보듬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런 마음이 진심으로 표현된 말들이 그립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담이 없는 소리, 가슴에서 애타는 소리, 꾸밈없는 자연스런 소리. 그러면서도 사랑이 깃든 소리 그런 소리가 바로 ‘어째야 쓰까이’입니다. 이렇게 좋은 말이 세월에 풍화되어 사라져버려 안타깝습니다.
‘어째야 쓰까이’
그런 소리가 사라져 버린 가을을 또 보냅니다.
이미 가을은 짙어버렸는데 안타까움이 밀려옵니다.
어째야 쓰까이!
지난 시절을 회억(回憶)해 보니 그런 소리 자체보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내 어렸을 적 기억으론 동네에서 아주 부잣집이 아니고서는 담이 없었고 대문도 거의 없었습니다. 혹 담이 있다 할지라도 탱자나무나 측백나무들로 울을 둘렀기에 담이라는 것이 모양만 갖추었지 마음만 먹으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 집에는 호미가 몇 개이고 괭이는 몇 개가 있는지 서로가 알았고 주인이 없어도 호미 몇 자루를 빌려가는 것쯤은 정으로 받아들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갑자기 비라도 쏟아지면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놓거나 농사철이면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보며 남의 일에 뛰어들곤 했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어째야 쓰까이’라는 말이 사라진 것은 담을 막는 문화에 편승한 것 같습니다. 담을 막는다는 것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분리의 원인은 사생활 보호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생각으론 부가 축적되고 소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담을 막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담을 너무 단단하게 막다 보니 이웃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 지조차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보도를 통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오만원짜리 지폐가 순환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은 ‘내 것’을 지키려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보입니다.
전원주택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딱딱한 담이 펜스(fence)라는 조금은 고급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어 미적 감각을 살려 내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펜스 역시 담은 담인지라 펜스가 아무리 고급스럽고 꽃들이 펜스를 수놓을지라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한 그것도 담은 담이기에 오히려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하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야 쓰까이!
무정하고 냉냉한 시대입니다. 나를 감추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가난했을 시절에도 정만은 따스했는데 풍요의 시대에 잃어버린 정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닫혀진 가슴들은 언제나 열릴까요?
‘어째야 쓰까이, 이 놈의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