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호실에서 바라본 행복

2013-12-27     해남우리신문
000호실은 00병원 여자 병실입니다.
아내의 교통사고로 000호실과 연을 맺었습니다. 병실엔 노인네들 몇 분이 함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는 병실에 들를 때마다 노인네들의 살아 온 이야기, 신세타령을 귀 너머로 듣고 옵니다. 노인들의 이야기는 순수한 토박이말들이 섞여있어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넋두리 같은 삶의 이야기에서 안쓰러움이 가슴을 파고들기도 합니다.
“옴메 내가 20일 만에 깨어났당께. 그란디 사고 난 차를 본께 뺑돌이에 내 머리가 무지하게 달려 있드라고 안하요.”
“뺑돌이가 뭐시다요”
“차 바쿠 안 있소오. 거그 그 뺑돌이에 내 머리가 다 빠져 부렀당께.” “그래가꼬 20일 만에 깨어 났다고 안하요. 죽어불제 뭐다러 살었능가 몰라.”
“그라믄 며느리들은 안좋아 해껀네?”
“80도 못되가꼬 죽으면 안되제. 쪼끔만 더 사시오.”
할머니들은 옆 사람이 물어본 말보다는 자기중심의 이야기만 합니다.
다른 할머니는 허리 수술을 했던 모양입니다. 걷기조차 힘들어 몸을 비틀고 앉아 계십니다.
“옴메 어저께 수술하러 갈 때 간호사한테 몽온은 마니 해도 존께 안 아프게 해주라고 했당께. 그랬더니 간호사가 몽온을 몰라아.”
“요새 것들은 몽온을 모르제.”
“그란디 수술을 안아프게 하더랑께. 아따 옛날하고 달러. 거그만 으뜨케 안아프게 하더랑께.”
“젊어서 고생해서 그래.”
“할머니 허리 수술 했으면 어짜든지 빤드시 누워 있어.”
또 다른 할머니가 배턴을 이어 받습니다.
“우리 영감이 튀통꺼리랑께.”
“이혼해 불제. 황혼 이혼도 많이 한다고 합디여.”
“영감탱이는 죽던지 말던지 내부러 둬불제이.”
“그 놈의 영감이 숨은 헐그덕 헐그덕 하면서 담배만 담배만 오지게 피어 디낀당께. 그랑께 밤낮 콜록 콜록하제.”
전화가 걸려 옵니다. 대화로 보아 딸에게서 걸려 온 전화 같습니다.
“뭣하러 와야. 애기들하고 성가신디. 오지마. 여기서 밥 세 때 다 줘.”
노인들의 삶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시절을 살아온 분들이어서 가슴의 설운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곤 합니다.
아내의 얼굴을 보러 병실에 들를 때마다 할머니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 소리가 황혼의 아픔이 되어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인생살이 고생 아닌 것이 있으리오만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모두가 고생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고생 저런 고생 하다 보니 70이요 80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병원에 누워서도 자식 걱정은 따라 다닙니다.
“요양원 가기 실은디 인자 할 수 없이 요양원이라도 가야제.”
“사는 것이 다 고생이랑께.”
병실엔 힘들고 약하고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회의 단면처럼 드러납니다. 머리에 서릿발이 허옇고 허리가 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합니다.
밀레니엄(millennium), 새로운 천년인 21세기가 도래한다고 희망의 노래를 시작했던 때가 벌써 13년이 흘렀습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은 4대강 사업으로 많이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우리나라의 국민행복지수는 중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장 중심의 서민정책으로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던 박근혜 정부의 주창(主唱)이 1년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입니다. 현세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는 정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플라톤(Piatō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ēs)와 같은 고전적 체계에서도 행복은 궁극의 목적이었습니다.
행복은 구호가 아니라 가슴에서 느끼는 감정의 높낮이입니다.
행복 이야기가 가슴에서 느껴지는 현실이 돼 지친 사람들마다 힘을 얻고 너무도 살기 좋은 세상이 열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제발 2014년도에는 조금씩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2013년의 모래시계가 거의 소진되어 갑니다. 보내는 서운함과 다가올 행복을 위해 두 손 모읍니다.
000호실의 할머님들 새해에는 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