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인서(答人書)

2014-01-10     해남우리신문
내 고향은 해남,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고향, 그러나 내 호적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고향 해남, 내가 떠나온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는데, 고향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못내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답인서란 언제나 올곧게 여러 가지 폐단을 상소했던 윤선도와 관련이 있다.
조선 17대 임금 효종은 성산목(星山牧)의 새로운 원님으로 고산 윤선도를 파견한다. 성산목은 몇 번 현으로 강등된 고을이었다.
임지로 파견된 고산은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에 전력하는 중 양전(量田)의 폐단을 상소한다.
양전이라 하면 백성의 토지를 측량하는 일을 말하는데, 당시 조정은 삼남인 전라, 충청, 경상도에 양전을 시행하면서 균전사(오늘의 감사)를 파견해 토지에 과세를 매긴다.
그러나 토지과세는 불공평하게 적용됐고 이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올린 것이 을해소 상소문이다.
해남윤씨 어초은파 시조인 윤효정(1476-1543)은 강진군 도암면 덕정리에서 출생해 해남으로 이사, 해남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호는 어초은(漁樵隱)으로 13세 때 정씨 집안으로 결혼해 자를 희삼(希參)이라고 했다.
고산 윤선도는 어초은 효정의 후손이다. 해남은 나의 관향이다.
필자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가족이 참사를 당했다. 부친과 백부는 국가로부터 보훈대상자로 인정받았다.
1957년 10월에 어머니와 나는 해남을 떠났다. 간 곳은 목포, 당시는 너무도 어려웠던 시기라 온금동 산등성 움막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근근이 생활했다.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의 덕에 가난했지만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대학을 다니는 동안 어머니는 나이 39세 때 세상을 떠나 나는 그해 군에 입대했다.
전역 1개월 후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고등학교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배구와 인연이 돼 체육계에서 활동을 하면서 고향해남 배구인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때도 나는 아픔을 겪었다.
우리 사회는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많다. 표독스럽고 인간성이 결여되는 정치인들에게는 아무리 학벌이 좋고 경력이 화려해도 선택을 하는데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내가알고 있는 고향 해남인들은 예의 바르고 도덕과 애향심이 바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정치인들이 있어 아쉽다.
해남 밖에서 해방이후 좌우익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오역에서 58년 전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해남인으로서, 목포여고에서 배구선수로 활동했던 고모님에게 늦게나마 답인서를 보냈다.  
한 때 부모님의 묘가 해남에 있는데도 벌초가는 것이 싫어 수년동안 인척에게 부탁했고 몇 해 전에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세월이 흐른 후 한(恨)이 없는 지금은 죄는 미워도 용서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서울에서 40년 가까이 살다가 귀향, 농사를 짓고 있는 김형기 친구 부부와 만남을 약속하면서 답인서 내용을 현실에 맞게 쓰고 싶었다.
사람은 정직해야 하고 이웃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백성의 편에서 대변해야 한다는 것을 아직 고향을 떠나지 않은 분들에게 을해소를 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