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도 세월은 흘렀제?
진도(珍島) 박형(朴兄)에게 한 해가 저무는 서운함을 적어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이렇게 세월은 흐르는 모양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도 흐르고 / 그쪽도 세월은 흘렀제? / 저녁 종이 울리고….’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한 구절과 박형의 가슴을 엮어 보내왔다. ‘그쪽도 세월은 흘렀제?’라는 말에 괜스레 가슴이 허허하다. 갈바람에 나뭇잎 뒤집히듯 생각이 뒤척인다.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나간 것은 다 그리워지는가 보다. 세계 오지 여행가 한비야 님의 에세이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더니 오래 전 끄적거려 놓은 기록들을 살펴보니 박형과 맺어진 지난 인연들이 아릿한 그리움 되어 빛바랜 활동사진이 영사막에 펼쳐지듯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박형은, 나이 차이는 있지만,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어 온 길벗이다. 기억의 시계를 되돌려 말하자면 당시에 박형은 계간지(季刊誌) 「진도사람들」의 발행인이었고 진도 역사의 교과서 같은 분이었다. 어떤 이들은 박형을 ‘진도의 보물’이라고도 불렀다. 우연한 기회에 여차여차(如此如此)해서 진도사람들을 접하게 되었고 박형의 청에 따라 ‘해남인의 눈에 비친 예향 진도의 문화 예술 활동’이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박형을 만난 지 어언(於焉) 20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세월이 꼭 어젯밤 꿈같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듯 세월은 지치지도 않았고 쉬어감도 없었다. 그동안 박형의 머리에 서리가 내렸고 밭이랑 같은 주름이 지고, 비정한 세월은 박형을 끌고 가듯 나도 끌고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풋풋했던 청춘은 퍼석퍼석해진 모습으로 회억이라는 창고에 쌓였다. 켜켜이 쌓이는 세월이 무겁다. 살아온 어제를 되작거려 보니 빈칸이 너무 많아 인생의 헛헛한 시장기가 밀려온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아가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듯이/ 슬픔과 행복 속에 우리도 변했구려」 서유석이 부른 ‘가는 세월’ 이라는 곡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 세월 지나가는 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처럼 가까이서 들린다.
인간은 시간 앞에 무력하다. 세월을 억지로라도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으로 얼굴의 주름을 펴고 쌍꺼풀 수술을 할지라도 세월은 멈춤이 없다. 그 아름답던 오드리 헵번도 시간 앞에서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가 되었듯. 인생이란 세월 사이로 무늬 지으며 흘러가는 것이니 거기 삶의 아름다움이 있고 또한 슬픔이 있다,
그렇다고 세월이 소모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월의 열매는 가실(秋)처럼 토실하다. 생생함을 잃었으나 원숙함을 주었다. 반 트럭 정도의 책을 읽었다. 사유(思惟)가 새로워지고 나만의 삶의 무늬가 그려지고 인생을 관조하는 법을 배웠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이다. 한 세대는 가고 다른 한 세대가 오는 것이 우주의 이치며 끝내 한 자리에 머물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어쩔 수 없이 세월은 흐를지라도 세월에 끄달리지도 편승하지도 않을 일이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Ernest Thompson Seton)이 저술한 「인디언의 복음」에 나오는 멕시코의 노점상 포타라모 인디언 노인처럼 매일 스무 줄의 양파를 파는 심정으로 그날의 삶을 사랑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일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이 흐르듯 쉼표도 없는 세월, 2018년 열두 달 중 마지막 달이 이운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은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만 흐른다. (중략)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고 우린 세월 앞에서 속절없다.
아침재를 넘어온 북풍에 시베리아의 눈 냄새가 실렸다.
그쪽도 세월은 흘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