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이 좋은 귀농인 화원면 질마리 박형훈씨 (끝)
2010-06-18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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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16세 되던 해 고향인 후산 마을을 떠나 목포에서 함석공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함석 전문공으로 자리를 잡게 된 박씨는 비록 영세하나마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할 만큼 한 때 잘나가던 호남양철공업사의 사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순간의 사고는 30년 동안 그가 이뤄놓은 경제적 기반을 한꺼번에 앗아가 버렸다. 목포실업전문대학(현 과학대학) 체육관 공사를 하던 80년도의 일이었다. 체육관 지붕공사를 위해 지붕에 올라갔던 박씨는 그만 미끄러져 3층 높이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이 사고로 골반에 복합골절을 입었지만 대학 측이 산재보험을 들지 않아 치료비의 일부만 지원받았기 때문에 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의사는 더 이상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2년 동안의 병원 생활을 한 후 그에게 남겨진 것은 장애 3등급이라는 판정이었다.
퇴원을 한 박씨는 더 이상 함석 일을 할 수가 없어 신발 장사와 커피 자판기 영업 등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박씨는 2002년 고향인 후산으로 귀향을 하려 했지만, 맘에 드는 집이 없어 질마리를 선택했다. 13가구가 사는 질마리는 이웃이 모두 형제처럼 의좋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박씨는 귀농하던 해 개를 키웠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개를 키우면서 근근이 버틸 수가 있었다. 아내도 악착스럽게 화원김치공장을 다니며 생활비를 보탰다. 그러나 개를 키우면서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결국 100여 마리까지 키우던 개를 지난해에 처분하고 2005년에 3마리로 시작한 한우사육으로 전환했다. 지금은 한우가 17마리로 불어나 그나마 위안이 되는데, 올해 안에 20마리로 불어날 것이라고 한다.
박씨의 꿈은 크지 않다. 평생 고생만 시켜온 아내를 편히 쉬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를 갖고 있는 그에게 그 일은 결코 소박한 소망이 아니다.
박씨는 소가 불어나면서 걱정거리가 생겼다. 작은 축사에 더 이상 소를 늘려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우분을 치워야 하는 일도 골반에 장애를 입은 그에게는 힘겨운 일이다. 질마리 인근에 현대화된 시설로 들어선 축사들을 볼 때면 박씨는 부럽기만 하다.
“보조는 아니더라도 융자라도 받을 수만 있다면….” 건너편 축사를 바라보며 말을 맺지 못하는 박씨의 얼굴이 흐려진다.
박태정 기자/